[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0. 시험..(1부)
학원에서는 석 달에 한 번씩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른다.
학교로 치면 기말시험 같은 것이다. 학원에서는 아마도 시험 결과와 레벨테스트를 비교해서
학생들에게 그동안의 공부에 대한 결과도 알려주고 실력이 떨어진 학생에게는 경각심도
심어주려는 의도로 만든 행사 같았다.
시험에 빠진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대부분 학생들은 시험에 참가했다.
시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겠지만 별거 아닌 이 시험이 가까워지면 희한하게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다. 나는 시험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수업 중에 선생들이 자꾸 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 선생들도 학생들의 실력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했다.
1;1 선생이라면 아무래도 자기 담당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시험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에게는 학원에서 지급하는 소정의 상품이 있다.
'마사지샵 무료 이용권'이라든지 '[PADI-Open Water] 자격증 무료 강습권' 이런 거였다.
상품은 별거 아니지만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경쟁심을 가지기는 충분하다.
들리는 소문에는 선생들도 정기적으로 토익인지 토플인지 시험을 치른다는 것 같았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테스트를 하는 거 같기는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선생은 토익이 700도
안되니 누구는 만점을 받았느니 하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들에게 물어보니
자기들 테스트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기말시험 날짜가 가까워오자 알렉스가 물어본다.
“형님 실력 많이 늘었죠?”
알렉스는 이제 더 이상 나하고 수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영어로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다.
“레벨 테스트 때 두 문장도 못 썼는데 지금은 열 문장은 쓸 수 있으니 나는 무조건 500%는 향상이야!”
라고 대답했다. 알렉스는 시험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어린 학생들과 괜히 경쟁심이 생긴다는 거였다.
그는 이번 달에 졸업을 해서인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것 같았다.
“형, 나 딱 한 달만 더하면 애들 코 납작하게 해 줄 자신 있는데.” 이런 말을 했다.
"애들 코 납작하게 해서 뭐하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알렉스는 고급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 학생들에게 꽤나 경쟁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한국에서 토익 공부 좀 하다 온 얘들이나 영미권에서 역으로 연수 온 애들이 거만
떠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시험이 다가오자 나는 학원의 상위 클래스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이 궁금해졌다.
내가 학원에 있는 모든 영어 고수들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이라는 게 있으니 대충 누가
"'네이티브 급'이다"는 정도는 안다.
학원에는 꽤 많은 영어 실력자들이 있다.
내가 아는 영어 고수는 지나, 에이스, 루니, 맥스 정도이다.
맥스를 고수 반열에 끼우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함께 수업해 본 사람 중에 맥스가 제일 잘하는 사람이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맥스는 단어에 무척 강했다. 자기 말로도 토익 공부할 때 단어 공부를 제일 많이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들이 모두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한다면 승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시험에 관심이 생겼다.
내 실력에 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누가 일등을 할까?"에 관심이 생긴 것이다.
학원에 있는 영어 고수들을 소개해 보면,
첫째로 '루니(Rooney)'가 있다.
'루니'는 서울대 2학년을 휴학하고 온 학생이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하지 않고 어학연수를 왔다고 했다.
학원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고급반에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학생들과 술도 자주 마시고 주말에는
여행도 자주 다니는 등 교우 관계가 좋은 친구다.
성격이 좋고 얼굴도 미남이라 학원생을 비롯한 선생이나 오피스 직원들까지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함께 수영장에 놀러 갔던 애들 말이 그는 수영 선수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엄친아’의 전형인 것 같은 친구였다.
이렇다 보니 여학생들과 염문도 많이 뿌렸다. 기숙사에서는 이성 간의 방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데 루니의 방에는 여학생들의 출입이 잦았다. 혹시라도 이성의 방에 갈 일이 있으면 문을 열어
놓는 것이 학원에서 정하고 있는 무언의 규칙이었다. 기숙사는 방에 들어갈 때 신발을 복도에 벗어
놓아야 하기 때문에 복도에서 신발만 보면 방에 누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니 일부러 신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복도만 지나가도 누가 그 방을 드나드는지는
대충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루니의 방은 어울리지 않는 신발이 문 앞에 놓여 있을 때가 많았다.
내 방을 가려면 그의 방을 지나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신발을 볼 수밖에 없었다.
멋진 오빠가 학원에 왔으니 여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번은 1:8 수업을 루니와 함께 할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8 수업은 자연스러운 수업 분위기다 보니 실력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한참 각 나라의 수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루니가 갑자기 칠판으로 걸어가더니 수학 퀴즈를 냈다. 유머러스한 수학 문제들이었는데
수업은 꽤나 재밌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질문을 했다.
나도 알고 있는 수학계의 전설 같은 이야기다.
'페르마의 정리' 이야기가 나오자 루니가 영어로 페르마의 정리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뭔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루니는 재밌다는 듯이 열심히 설명했다.
나중에 프랭크 선생에게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고 했더니 자기도 못 알아들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결국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의 문제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적이 있다.
어쨌든 루니는 영어로 그 수학 농담 정도는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 강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둘째로 학원에 '에이스(Ace)'라는 학생이 있다.
에이스는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이다. 만날 술만 먹으러 다닌다.
학원에서 '린다(Linda)'라는 여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술을 안 마시면 린다와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 에이스는 첫 달에 린다를 만나면서 원장을 비롯한 학우들에게 “우리 사귄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다. 그래서 나쁘게 날 수도 있는 소문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린다는 예쁘고
지적인 멋진 처자였다.
에이스는 하루 중 수업이 없는 시간은 잠을 자는 게 일이었다.
그는 기숙사 방문을 닫지 않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방이 계단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이 보기 싫어도 모두 방 안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오를 때 방 안을 그는 시종일과 엎어져
자고 있었다. 하루는 "왜 그렇게 잠을 많이 자냐?"라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오기 전에 잠을 너무 못 자서 보상심리가 작용해서 그런 거 같아요.”라고 했다.
나는 에이스를 볼 때마다 참, 팔자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안 하냐니까 웃으며 자기는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했다.
물론 얼마 뒤 그 이유를 알게 됐다.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