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위험한 것'과 '두려운 것'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4. '위험한 것'과 '두려운 것'


알렉스와 레이가 학원을 떠났다. 학원에 온 지 벌써 3개월이 지난 것이다.

나 보다 2주 늦게 시작했으니 나도 이제 학원 생활 절반을 훌쩍 넘겼다는 뜻이 된다.

알렉스와 레이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왜, 졸업식 하지 않냐?”라고 묻자.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의미도 없는 졸업식 하면 뭐해요?”


알렉스와 레이는 몇 주 전부터 학원 근처에 방을 알아보고 다녔다.

둘이 돈을 보태 2개월 정도 머물 거처를 찾는다고 했다.

학생들은 독립을 하게 되면 싼 방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우범지역에 방을 구하기가 쉬운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학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안전한 지역의 꽤 괜찮은 콘도(우리나라의 원룸 형태)를 구했다.

1층에는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식당과 슈퍼마켓이 있는 건물이었다.

주말에 집들이라고 하며 간단한 물품들을 사들고 그곳을 찾았다.


저녁 식사를 1층의 일본 식당에서 하고 집 구경을 했다.

방 2개와 거실이 있는 풀 퍼니처(침대, 냉장고 등기본적인 5개 이상의 가구) 집이었다.

전기세와 관리비를 별도로 하고 한 달에 2만 5천 페소(65만 원) 정도의 월세를 낸다고 했다.

그들이 방을 구한 것은 공부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둘 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고 알렉스는 세부로 이주를 생각하는 듯했다.


앉아서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했더니 약속이 있다면서 다음에 놀러 오라고 한다.

연신 전화를 걸고 받는데 무척 바빠 보였다.

고작 3개월 산 세부에서 뭐 그리 바쁜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통제가 심한 학원을 벗어났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집들이를 끝내고 나오는데 같이 시내로 가겠냐고 물어본다.

아마도 일찍 보내는 것이 미안해서 인사치레로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재밌게 놀라고 하고 그들과 헤어져 걸어서 학원을 향했다.


그들은 2명의 가정교사를 구했다고 한다. 하루 2시간, 두 번 1:1 수업을 하는 것이다.

공부할 생각은 하는 것 같았지만 과연 그런 식으로 공부가 될까 싶었다.

나는 아직도 공부는 학교나 도서관 혹은 독서실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세부는 혼자서 공부하기에 너무 유혹이 많은 곳이다.


학원을 한 걸음만 나서면 술집과 클럽 그리고 사람을 유혹하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절제하며 공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원을 나가 살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알렉스, 레이처럼 애당초 공부가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야 괜찮지만 오로지 공부를

위해 온 사람은 절제의 스트레스는 수도승의 고행과 비슷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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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사는 것은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의외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자유’는 사람을 용감하고 파렴치하게 변화시킨다.

‘경험’이라는 말로 좋게 포장 하지만 위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욕망이라는 괴물은 너무도 쉽게 절제를 무너뜨리고 인간성을 파괴한다.

학원을 나가는 것의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유흥을 위해서라면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아마도 놀기(?)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공부하려고 밖에 방 잡았어요.”라는 말은, “나 지금부터 한 번 놀아 볼 거예요.”라는

말과 동의어로 내겐 들린다.


알렉스, 레이와 헤어져서 혼자서 밤길을 걸어 학원으로 향했다.

세부에 처음 도착하면 매니저로부터 듣는 첫 번째 주의사항이 밤에 혼자 골목길이나 사람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그곳이 학원 바로 옆 골목이라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매니저는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그런 주의사항은 벌써 오래전에 잊었다. 일탈이 익숙해지면 위험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게 마련이다.


나는 혼자 동네의 골목길을 걸어 학원으로 향했다. 달은 밝고 바람은 신선했다.

토요일 밤이라 동네 사람들이 골목길에 테이블을 놓고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와 마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과 함께 더위를 피해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내가 걸어가자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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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맥주도 한 잔 얻어먹었다.

마작을 하고 있던 중국 할머니가 자꾸 말을 시켜 옆에 앉아 게임을 보며 꽤 길게 이야기도 나눴다.

내가 일어서자 그들이 웃으면서 잘 가라고 인사를 했다.


나도 맥주 고마웠다고 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잠깐이지만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학원에 도착하니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다음 날 기숙사 복도 게시판에 이런 신문기사가 붙어 있었다.

“한국 학생들 노상강도와 격투”라는 제목이었다.

어제저녁 우리 학원 옆 골목에서 오토바이 강도와 한국 학생들이 격투를 벌였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학원 옆에는 약 300명 정도가 기숙하며 공부하는 큰 한국 어학원이 있다.

그 학원의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 세 명이 밤길을 걸어 학원으로 돌아오던 중 우리 학원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를 탄 2명의 강도와 마주친 것이었다.


강도들은 권총을 꺼내 들고 학생들을 위협하며 지갑과 여학생의 가방을 내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남학생 중 한 명이 강도들이 체구도 작고 총도 낡아 보여서 가방을 주는 척하다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20대 청년 3명이었으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총이 발사되어 남학생의 허벅지를 관통했고 강도들은 여학생의 가방만 들고 도망쳤다고 한다.

학생은 급하게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한인 신문에서 복사된 그 기사를 보자 섬찟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고가 났던 곳은 어젯밤 내가 지나온 길이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그들이 운이 나빴던 걸까?

내가 한 시간만 늦었어도 강도들과 마주쳤을 시간이었다.

게시판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많이 풀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에서 살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필리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의 숫자는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적다.

하지만 총기 사고를 교통사고와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필리핀처럼 강도 사건이

일어나지만 필리핀이 더 위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리핀은 총기를 소유할 수 있고 암시장에서

싼 값에 불법 총기를 살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구조라는 뜻이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이 많아 생계형 범죄가 흔하다. 배가 고파 도둑질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니 위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두려움에 떨며 숨도 못 쉬고 살 정도는 아니다.

이방인에게 잘 대해주는 평범한 사람이 더 많다.

즉, 실제로 살아보면 한국 언론에서 나오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어젯밤 내가 지나온 길에서 한 시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일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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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기사를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가는데 뜬금없이 파이터 '추성훈'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질문자 : 경기가 위험해 보이는데 두렵지 않으세요?


-추성훈 : (잠깐 생각하더니) 위험한 것과 두려운 것은 다른 거 아닌가요?

경기가 위험한 건 맞지만 두렵지는 않아요.

두려워서 경기를 피한다면 다른 직업을 택해야겠죠."


당시는 흘려들었던 이야기인데 어젯밤 일을 겪고 나니 이 말이 다르게 들렸다.

겁은 나지만 그렇다고 피하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 있다.


두려움에 빠지면 싸움을 시작할 수가 없다.

세상살이를 격투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부모님 품이 아니면 이 세상 어디에도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어차피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두려워서 피하는 것보다 위험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게 더 중요하다.


위험한 것을 위험하지 않은 척하는 것도 안 되지만, 위험을 과장되게 받아들여 이성을 잃고

두려움에 빠져 버리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물론, 쉽지 않은 문제다.


필리핀은 위험한 곳이라고 소문은 나 있지만 사람이 못 살 곳은 아니다.

규칙을 잘 따르고, 자만하지 않으며, 현명하게 행동하면 위험은 피 할 수 있다.


"낯선 곳에 머물수록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에 학원 안내 책자에서 본 내용이다.

낯선 문화를 맞이할 때 지켜야 하는 중요한 교훈인 듯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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