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키 & 히로 (1부)

(1부)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5. 유키 & 히로... (1부)


학원 건물의 옥상은 식당이다.

넓은 옥상의 한쪽에 식당이 있고 식당 앞은 흡연이 가능한 휴게실이다.

저녁밥을 먹고 혼자 옥상 휴게실에 앉아 먼산을 보고 있는데 마이마이가 설거지를

하려고 내 옆을 지나 식당 주방으로 들어갔다. 말을 붙이려고 하니 날 보더니 싱긋

웃고는 다른 도우미들과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식당에는 학생 두어 명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옥상 휴게실에 앉아 있으면 멀리 막탄 섬 공항에 일몰을 배경으로 착륙하는 비행기가

굉장히 멋진 장면을 보여 준다. 약간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이랄까.


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않아서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식당을 나와서

옆에 앉았다. 보통 여학생들과는 달리 복장이 약간 특이했다. 나풀거리는 긴 홈드레스를

입고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가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처음 보는 여자였다.

잠시 가만 앉아 있다가 그냥 있기 어색해서 내가 먼저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 하고 묻자, 눈이 똥그래지더니 배시시 웃고는,

“How are you? I’m japanese.”라고 답 한다.

“Ah, Sorry” 하고는 나는 내 이름을 영어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유키(Yuki)’라고 소개했다.

36세이고 도쿄에서 어젯밤 왔다고 한다.

웃으면 귀엽게 눈이 작아지는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영어를 잘했다.

전형적인 일본인의 발음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기본적인 질문은 모두 여유 있게 답했다.

그녀는 내게 담배를 피워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Of course, why not?"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담배를 피우며 30분가량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유키’가 한자로 ‘雪’이냐고 하니 맞다고 한다. 그녀가 한자로 자기 이름을 써줬다.

그래서 나도 한자로 내 이름을 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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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금요일에 저녁에 그 자리에서 또 유키를 만났다. 유키는 날 반가워했다.

함께 담배를 피울 동료가 있어 좋은 것 같았다. 우리가 잡담을 나누고 있자 ‘하나’라는

한국 여학생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나는 유키의 옆 방이어서 유키가 가끔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본다고 했다. 하나는 영어를 잘했다. 둘은 주로 영어로 대화를 했고 나도

중간에 끼어들어 이것저것 물어봤다.


원래 처음 신입생이 오면 1:4 수업의 학우들이 금요일이나 토요일 저녁에 외식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간단히 맥주라도 하면서 학우들끼리 서로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유키가 온 다음 날

함께 휴게실에서 만났으니 오늘이 첫 금요일인데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게 어딘가 좀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어디 안 가냐고 물어보자 유키는 자기에게 아무도 나가자고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내가 하나를 돌아보니 하나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학원 선배로서 뭔지 모를 의무감 같은 게 들었다.

그리고 유키가 어리고 예쁜 처자였으면 학원에서 주말을 이렇게 혼자 보낼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하나에게 물었다.

“지금 시간 있냐고 물어봐?” 했더니 하나가 “왜요?”한다.

“유키한테 나가서 맥주 한잔 하자고 해, 내가 산다고.” 했더니, 하나가 유키에게 뭔가를 말했다.

그러자 유키가 “Really? Thank you so much. That's what I want.”라고 하면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이 말을 듣고는 옆에 있던 하나가 "저도 같이 갈까요?" 하며 날 쳐다본다.

"나야 땡큐지!!"하고 대답했다.


나는 1층 로비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조금 더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두 여인이 로비로 내려왔다.

우리는 학원 옆 골목에 있는 맥주 집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꽤 많은 학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키는 맥주를 잘 마셨다. 하나도 술을 잘 마셨다.


유키는 도쿄에서 크루즈를 전문으로 하는 관광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크루즈에서 손님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일이 주 업무였다고 한다.

북한에도 자주 갔었다고 해서 신기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지금은 은퇴했냐고 했더니.

웃으며 잠정적인 은퇴라고 했다. 돈이 많은가 보다고 했더니 먹고 살만큼은 있다고 하면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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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는 결혼은 하지 않았고 남자 친구도 없다고 했다. 세부에서 영어 공부가 끝나면 아르헨티나로

가서 스페인어와 탱고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왜, 스페인어를 아르헨티나에 가서 배우냐고 물었더니,

평소에 아르헨티나에서 살아 보고 싶었다나, 아르헨티나에서 공부가 끝나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 거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난 "산티아고 순례길"이 어딘지 몰랐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하나가 유명한 여행지라고 알려 줬다.

나는 그때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이 뭔지 몰랐다.


하나는 22살이고 대학생이었다.

재수를 해서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학연수 때문에 1년이 더 늦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작지 않은 키에 군살이 없는 글래머러스한 미인 스타일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꼈고 화장을 하지 않아 어려 보여 처음엔 대학 신입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


나는 맥주집에서 두 여자를 심문하듯이 계속 질문을 던졌다.

내 영어는 신상 털기 질문에 특화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학우들이 자주 바뀌다 보니 질문의 루틴이 생긴

것이다. 제3국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돌직구성 질문을 맘대로 해도 되는 장점이 있다. 어감을 잘 모르니

아는 말을 막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 나이가 몇 살이냐? 남자 친구 있냐? 앞으로 뭐 해서 먹고 살 거냐? 돈 많냐?”

같은 질문들이다.


만약 내가 처음 보는 한국사람에게 이런 걸 물어봤다면,

“처음 보는 사람이 별 걸 다 물어보네”라며 듣는 사람이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호 간 제3 국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 그런 생각이 없어진다.

서로가 모국어가 아니니 어감까지 파악하진 못하니 상처받을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경우 영어를 못하면 못 할수록 예의 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다.


셋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36살 유키는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22살 하나는 졸업과 취직에 대한 고민만

이야기한다. 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길게 들었지만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줄 만한 나의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평범한 한국 청년인 '하나'가 조금은 안 돼 보였다.

뭔가 자유롭지 못한 하나의 모습에서 나의 20대를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세대가 달라도 고민은 똑같구나."


나는 하나가 유키 나이가 됐을 때 지금의 유키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유키는 어떤 계기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유키의 그런 모습이 부러웠다.

아마도 유키는 일본에서도 특이한 인물에 속할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유키, 하나와 꽤 친해졌다. 그건 큰 수확이었다.

학원에서 나이 많은 남자 학우 외에는 거의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데,

적어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여자 사람이 두 명은 생긴 것이다.


살면서 대화할 사람이 있는 건 기쁜 일이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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