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6. 유키 & 히로... (2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명의 일본인이 학원에 왔다.
‘히로(Hiro)’라고 하는 22살의 일본 대학생이었다. 키가 컸고 몸은 탄탄해 보였다.
그는 입학식에서 도쿄의 모 공과대학에 다닌다고 했다. 유키처럼 일본인 특유의 억양을 구사했고
영어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었다.
나는 유키에게 친구가 생겨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그리 가깝게 지내는 거 같지는 않았다.
히로는 한국 학생들과 친하게 지냈다. 한국 학생들은 저녁에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주말에 클럽을
갈 때 히로를 서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루는 저녁식사를 하고 옥상에서 거리를 보는데, “뭐하고 계세요?”하고'하나'가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나는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거긴 히로와 한국 학생들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 히로는 매일 바쁜 거 같네
-하나 : 히로 인기 많아요...ㅎㅎㅎ
-나 : 왜?
-하나 : 잘 생겼잖아요.
-나 : 저게 잘 생긴 거야?
-하나 : 아저씨는 몰라서 그래요, 요새는 저렇게 생겨야 잘 생긴 거예요.
-나 : 주걱턱에 비쩍 말랐는데 뭐가 잘 생긴 거냐?
-하나 : 요새는 저런 스타일 좋아해요.
-나 : 영어는 좀 하냐?
-하나 :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여기 오기 전에 ‘피지(Fiji)’에서 6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했다죠.
-나 : 피지(Fiji)?
-하나 : 네, 그런데 자기 말로는 공부는 안 하고 서핑만 6개월 동안 했데요.
내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서 서핑을 할 거라나 뭐라나.
-나 :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하나 : 저 수업 같이 받아요. 술도 몇 번 같이 마셨고요.
토익이 600점 정도 된데요.
-나 : 그거 높은 거 아니잖아.
-하나 : 히로는 700점만 넘으면 좋겠다고 하던데요.
일본에는 토익 700점 넘는 사람 별로 없데요.
한국에는 900점 넘는 사람도 많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던데요.
-나 : 원래 공부 못하는 애였나 보네.
-하나 : 아녜요. 걔 좋은 학교 다녀요.
-나 : 그래?
-하나 : 그리고 할아버지가 부잔가 봐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던데요?
-나 : 일본은 가족이 하는 작은 회사들 많아, 꼭 부자인 건 아닐 수도 있어.
-하나 : 그런가?
-나 : 너도 좋냐? 저런 스타일?
-하나 : 저는 마른 남자 별로예요..
-나 : 다행이다..ㅎㅎㅎ....
-하나 : 뭐가요?
-나 : 그냥 하는 소리야.... ㅎㅎㅎ
일본이라고 먹고살기 좋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 가도 “삶이 만만한 곳은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마도 유키나 히로는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꼭 돈이 많아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그들에게는 뭔가 분명히 다른 것이 있어 보인다.
유키는 프로페셔널 급 스쿠버 다이버이다.
세부를 어학연수지로 선택한 이유가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번에 올 때도 스쿠버 장비를 챙겨 오느라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히로는 서핑을 한다. 파도가 없는 세부에서 서핑은 쉽지 않을 것이다.
피지(Fiji)에서 공부는 안 하고 서핑을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서핑 좀 그만하고 공부 좀 하려고
여기 왔다고 한다. 어쨌든 피지에 있으면서 서핑을 배웠고 서핑 마니아가 된 것이다.
여기 일정이 끝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갈 거라는데 나는 히로 덕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서핑으로 유명하다는 걸 알게 됐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탱고를 배우고 스페인의 순례길을 여행하는 걸 꿈꾸는 30대의 여인,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공부하고 놀기도 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서핑을 하고 싶어
하는 20대 청년. 나는 40년을 넘게 한국에 살면서 내 주위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인터넷이나 방송에서는 많이 봤다.
현실에서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항상 미래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고, 해답 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돈이 좀 있다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하나와 유키에게 “취미가 뭐냐?”라고 물었을 때,
유키는 ‘어느 걸 취미로 말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고,
하나는 ‘내 취미는 뭘까?’를 고민하는 거 같았다.
스물두 살의 하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제대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있는 게 맞을까?"
"나는 저 나이 때 하고 싶은 게 있기는 했던가?"
"지금의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 지 알고 있을까?"
"너무 늦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