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겜블러(Gambler)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7. 겜블러(Gamb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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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bler [겜블러] : 노름꾼, 도박(투기) 꾼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 또는 금전에 대한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기회의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

즉, 특별한 사건의 결과에 기회를 가지려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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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만 있다 보니 엉덩이에 곰팡이가 피려고 한다.

되지도 않는 공부 핑계로 평일이고 주말이고 학원 밖으로 나가지를 않다 보니 몸이 엉망이다.

한국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수영장을 다녔기에 이렇게 몸이 굳으면 수영장을 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건도 안 되고 그런 일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냥 꿈만 꾼다.


나는 세부에 오면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 훔쳐보는 게 일상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놈의 영어 공부에 치여서 하루 24시간 학원에만 처박혀 꼼짝도 못 하고 살고 있다.

그러던 중 넬리아 수업 팀들과 ‘세부 워터프런트 호텔’로 밤 수영을 갔다.


밤에 야외 수영장에서 밤수영을 하는 것은 참 멋진 일이었다.

해가 지자 수영장의 물속에 조명이 들어왔는데 이게 일렁임에 어우러져 무지개 색으로 변했다.

무지갯빛 물속에서 몸을 젖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비치 베드에 누워 밤하늘을 보는데 “매일 이러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내 생활 수준에 한국 호텔의 밤 수영을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달이 비치는 수영장을 보며 "외국에 오니 참 좋구나"는 생각을 했다.


학우들과 밤수영을 다녀온 후 일요일 오전이면 혼자서 수영장을 갔다.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혼자서 수영장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호텔 수영장에는 일요일 아침에는 거의 사람이 없다. 게다가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싼 가격의

호텔 수영장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좀 더 일찍 이런 곳을 알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웠다.


세부 워터프런트 호텔은 대중교통인 “지프니”로 15분이면 갈 수 있었다.

위험 지역이 아니라 걸어서도 갈만한 거리였다. 걸어갈 때면 동네 사람 구경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이발소에서 머리도 깎았다. 현지인이 하는 이발소의 이발 비는 50페소(1500원) 정도밖에 안 해서

나는 머리 깎을 일이 있을 때는 꼭 걸어서 수영장을 갔다.

호텔 수영장 입장료는 500페소(12,500원)였는데, 2시간 정도 수영을 하고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돌아오면 휴일 오후 시간을 상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휴일 오전을 보내는 것이 내겐

비밀스럽고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세부 워터프런트 호텔은 세부 시티(Cebu City)에 있는 매우 큰 호텔이다.

세부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 중 하나인데 사실은 카지노로 유명한 곳이다.

걸어서 호텔을 들어가다 보면 성곽처럼 서있는 카지노 건물이 정문 옆에 우뚝 서 있다.


하루는 수영을 끝내고 호텔을 나오는데 그날따라 카지노 간판이 살갑게 눈에 들어왔다.

학원에는 "카지노에서 적발 시 퇴학"이라는 규정이 있다. 평소 CASINO에 관심이 없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조항인데 그날은 간판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카지노에 뭐가 있길래 가지 말라고 하지?"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일단 호기심이 발동하니 카지노로 향하는 발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카지노 입구 계단을 올라가니 도우미들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어색한 몸짓으로 소지품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서니 묘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카지노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 서양인 등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필리핀 사람이 가장 많았다.

카지노 내부에 2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는데 거기는 VIP룸이 있다고 했다.


카지노 입구에서 처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ROULETTE"(룰렛) 테이블이었다.

룰렛은 얼핏 봐도 쉬워 보였다.

별다른 재미가 없어 보이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룰렛이 쉬워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게임이라고 했다.


룰렛 테이블 옆으로 말로만 듣던 "Baccarat(바카라)"와 ‘Black Jack(블랙잭)’,

‘HIGH & LOW(주사위 게임)’와 같은 테이블 게임들이 줄줄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가장 안쪽에는 "POKER(포커)" 게임장이 있었다.


넓은 공간을 여러 테이블 게임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카지노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한국에서 "파친코"라고 불리는 "슬롯머신"이었다.

슬롯머신은 전체 카지노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넓었다.


일요일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슬롯머신"을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그 게임이 왜

재밌는지 나는 이해가 안 됐다. "저렇게 기계 앞에 앉아서 스위치만 누르는 게 뭐가 재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Waterfront, Cebu)

카지노를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려는데 한쪽 테이블에서 “와!!” 하는 탄성이 나고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가보니 두 명의 필리핀 사람과 20대로 보이는 잘생긴 한국 청년 둘이

'바카라'를 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은 다른 곳과 다르게 둥근 칩과 함께 50,000, 100,000이라고 써져 있는 네모난 카드

형태의 칩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칩 하나가 약 125만 원, 250만 원이라는 뜻이다.

판돈이 커서인지 그 테이블에는 유독 구경꾼이 많았다.


특이한 점은 한국인 청년 두 명은 팀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둘 중 한 명이 게임을 하고 다른 한 명은 게임은 하지 않고 서포터만 했다.

바카라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딜러와 손님이 카드를 두 장씩 받아 9에 가까운 사람이 이긴다.

처음 두 장의 숫자가 너무 낮으면 한 장을 추가로 더 받을 수도 있다.

옵션 사항들이 있지만 중요하진 않다.


전문 도박꾼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 눈에 바카라는 운 좋은 사람이 이기는 단순 게임처럼 보였다.

나는 구경꾼에 섞여 한국 청년들을 지켜봤다. 한국 청년들은 꽤 많이 따고 있었다.


유심히 보니 그들은 나름대로 룰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두 청년 중 한 명만 게임을 했고 한 명은 서포터로 앉아 돈만 챙겼다.

게임은 순전히 한 명이 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동 중 가장 신기한 것은 테이블 위에는 일정 금액 이상의 칩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대충 보니 10만 페소 칩 2장, 5만 페소 칩 4장, 그 외 액수가 적은 둥근 칩은 있는 대로 놓고

게임을 했다.


베팅은 액수를 정하고 하는 것 같았고 게임 중에 돈이 일정액 이상 불어나면 옆에 있는

서포터가 5만이나 10만 페소 칩을 가방에 넣었다. 그래서 테이블 위에는 항상 일정 금액의

칩만 남아 있었다. 내가 보는 동안은 운이 좋았는지 서포터가 계속 칩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

10만 페소 칩을 벌써 몇 장이나 가방에 넣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1천만 원에 가까운 칩이

가방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나자 옆에서 서포터를 하던 친구가 “벌써 40분 지났네...” 이러면서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테이블에 있던 칩은 작은 칩 하나까지 모두 가방에 챙겼고

딜러에게 팁으로 작은 칩 하나를 던지곤 웃으면서 휴게실로 사라졌다.


나는 그 장면이 무척 신기했다.

“도박장에서 돈 따는 사람도 있네?”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도박이라면 영화에서 본 것처럼 패가망신하고 손가락 잘리고 파산하고 이런 것만 생각했는데,

그날 내가 본 카지노에서의 장면은 그렇게 살벌한 것이 아니었다.


70432826.JPG


구경을 마치고 카지노를 나서며 돌아보니 아까 그 한국 청년 두 명이 다른 테이블에서

또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포터 하던 친구가 카드를 잡았고 게임을 하던

친구가 돈가방을 메고 옆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저게 “겜블러 인가?”하는

생각을 했다.


카지노 테이블에는 돈이 너무 흔하다. 아니 솔직히 테이블 위의 칩은 돈으로 보이지 않았다.

숫자가 쓰인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보였다.


학원으로 돌아오며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학원의 점심시간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할 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한국 슈퍼에서 80페소짜리 컵라면 하나와 40페소짜리 빵 2개를 샀다.

오늘은 점심 먹는 데 160페소(약 4,000원)를 썼다.


"조금만 서둘렀으면 학원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CASINO에는 시계도 창문도 없었다.

잠깐 이었던 거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났다.


학원에서 혼자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간편 조리' 스위치를 세 번 눌렀다.

그랬더니 디지털 숫자 90이 두 번 깜박이더니 불이 켜지며 전자레인지 안의 라면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줄어들고 있는 디지털 숫자를 보고 있자니 CASINO 테이블 위에 있던 칩들이 생각났다.

바카라 한 게임에 걸리는 시간은 90초 정도이다. 90초라는 시간 동안 2~3백만 원 많게는

1~2천만 원이 왔다 갔다 한다.


"90 초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났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카지노에 가지 않았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라기보다 뭔지 모를 많은 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곳을 둘러보는 것을 '여행'이라 부른다.

카지노는 한 번쯤 가볼 만한 여행지였지만 내겐 다시 가보고 싶은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다.

아직 가 볼만한 곳이 많은데 내게 맞지 않는 장소를 또 가는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 재밌어 보이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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