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레벨 테스트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2 레벨 테스트
토요일 새벽에 세부(Cebu, Philppines) 막탄 공항에 도착했다.
아니 금요일 밤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공항 입국장의 로비를 나서니 어학원에서 나온 한국인 매니저가 내 이름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으로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매니저가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들려준다. 왠지 내게는 그 말이 겁주는 말처럼 들렸다.
“밤에 혼자 바깥에 나돌아 다니면 총 맞을 수 있습니다.”
“현지 여자들이 한국 남자들 보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어
돈 뜯어내려고 하니 여자 조심해야 합니다”.
“평일 밤 12시, 주말 새벽 2시가 통금 시간이니 어기지 마세요."
"기숙사 규율 어기면 바로 퇴학 조치합니다.” 등등
덧붙이길 나이 든 사람들은 공부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필리핀 세부(Cebu)를 많이 찾는데
그런 생각 있으면 짐 싸서 돌아가라는 말도 넌지시 덧붙인다. 가뜩이나 불안하고 막막한데
기분이 별로다.
-나 : “혹시, 차에서 주의 사항 듣고 돌아간다는 사람 없었어요?”
-매니저 : “가끔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특히 여자분들은...”
-나 : 헐~~~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학원 기숙사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았다.
주말이라 학생들이 여행을 많이 가서 기숙사가 썰렁하단다. 어차피
새벽이었으니 학원생들이 눈에 안 띄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학원 구조>>
*1층 - 로비, 세미나실 및 사무실, 1:1 강의실
*2층 - 그룹 수업 강의실
*3층 - 여자 기숙사, 샤워실, 화장실
*4층 - 남자 기숙사, 샤워실, 화장실
*옥상 - 식당 및 휴게실
매니저는 기숙사에 방이 꽉 차서 제일 나쁜 방만 남았다며 계단 옆의 구석진 골방으로 날 안내했다.
방문이 책상에 걸려서 반 밖에 안 열리는 모퉁이 방이었다. 침대와 옷장 그리고 작은 책상과 함께
창문에는 소형 에어컨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작은 베란다가 있다는 것이다.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은 방 밖의 복도 끝에 있었다.
매니저가 가고 난 뒤 베란다로 나가 보니 후끈한 열대의 바람에 숨이 막힌다.
머릿속이 혼미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느낌이 불편한 방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언가에서 낙오된 듯한 그날 밤의 내 모습이 무의식에 오버랩되어 생긴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창밖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어 졌다.
담배를 끊은 지 3년이 지났는데 세부(Cebu) 도착하고 2시간도 되지 않아 담배 생각이 난다.
"젠장, 이건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이런 넋두리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베란다로 나가 보니 하늘엔 보름달이 떠있고 저 멀리에는 높은 건물들도 보였다.
학원 옆 양철지붕 집들을 보니 예전 내가 살았던 부산 변두리 동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은 80년대 초반의 한국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
그 장면을 보다가 문득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베란다로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을 기록했다.
밤이 지나고 오후가 되자 매니저가 방으로 찾아와서 쇼핑을 가자고 했다.
매니저는 쇼핑몰로 함께 가면서 메모지 한 장을 줬다.
화장지, 치약, 칫솔, 환전 등 꼭 필요한 물품과 해야 할 일들이 적혀 있었다.
쇼핑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그날 오후는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잠만 잤다.
피곤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왠지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오후에 학원 앞 구멍가게에서 말보로 라이트 한 갑과 라이터를 샀다.
3년 만에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더니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그날 밤 담배를 꽤 많이 피웠던 것 같다. 그렇게 둘째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드디어 정상적인 일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 됐다.
식당과 로비에 사람들이 많아졌고 뭔가 학원 같은 모습이 보인다.
오전에 잠깐 원장과 미팅을 했다.
원장은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는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여기가 세부에서 가장 오래된 학원 중 하나라는 것을 시작으로 어젯밤
매니저에게 들었던 주의사항들을 또 한 번 들어야 했다. 그리고 말끝에
오전에는 레벨테스트를 할 것이니 오후부터 수업에 들어가라고 한다.
“레벨 테스트” 할 것 없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어는 Thank you, OK
정도밖에 없다고 했음에도, 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레벨 테스트는 꼭 해야
한다고 한다. 젠장.... 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이 나이에 또 시험이라니..."
사무실 옆 세미나 실에서 혼자 '레벨 테스트'라는 것을 했다.
영어로 자기소개서나 수필 같은 걸 써서 내라는데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백지를 보고 있기를 20분이 지났다.
나를 안내했던 현지인 직원이 돌아와서는 백지를 보더니 이름이라도 쓰라고 한다.
그래서 레벨 테스트 용지에 딱 한 줄 썼다. 아니 두 줄 썼다.
“My name is Kim 00,
“Thank you."
그가 씨~익 웃는다. 그러더니 “Don't worry about..... 솰라솰라..”
시험에 백지를 낸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건 백지였다.
무얼 쓰고 싶었지만 진정 아무것도 쓸 수 없어서 낸 백지였다.
민망했다.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는데 무진장 부끄러웠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입에서는 나도 모를 욕이 나왔다.
그건 그 상황이 쪽팔려서 나 자신했던 소리였을 것이다.
레벨 테스트를 끝내고 세미나실을 나서며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영어가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혼자 이런 자격지심에 빠지는 게 더 바보 같았지만
그날 내가 겪은 느낌은 '열패감' 그 자체였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