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프롤로그

#01. 프롤로그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1 프롤로그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동양계 승무원이 내게 다가와 중국어로 솰라솰라 말을 건다.

미인 승무원이 내게 말을 걸어주니 고맙기도 하고 살짝 흥분도 된다.

근데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뚱하니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당황한 그녀가 말을 바꿔 다시 뭐라 뭐라 내게 말을 건넸다.

이번엔 영어다.


그녀의 말 중 한마디는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내 이름이었다.

영어에도 대꾸를 못하자 그녀는 다시 일본어로 뭔가를 설명했다.

그런데 내가 일본어에도 대답을 못하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약간 당황하는 눈치다.


49451711.JPG


그때 내 앞 왼쪽 편에 앉아 있던 대머리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친구 분들에 대해서 물어 보내요”

“아 그래요? 근데 그건 왜 물어볼까요?” 내가 물었더니,

“잠시 만요” 하고는 승무원에게 일본어로 뭐라 뭐라 말을 한다.

승무원은 영어로 대답을 했고 그 노신사도 일본어에서 영어로

말을 바꿨다. 아마도 승무원은 영어가 더 편했나 보다.


나는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서울 김포로 가는 ‘유나이티드 항공’에 타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 있어야 할 동료 두 명은 아직 비행기에 타지 않은 상태였다.

승무원과 대화가 길어지자 승객들이 이쪽을 흘깃흘깃 훔쳐보기 시작한다.

대화를 끝낸 그 노신사가 내게 물어본다.


노신사 : “혹시 일행이 있으세요?”

나 : “네, 동료 2명이 아직 안 왔어요?”

노신사 : “공항에는 같이 왔나요? 아니면 일정이 변경됐나요?”

나 : “공항에는 같이 왔는데 배고프다고 햄버거 가게에 잠깐 갔어요?”

노신사 :.......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음)


노신사의 설명에 따르면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 되어 이제 항공기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

항공기는 문을 한 번 닫으면 다시 열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한 번 닫힌 비행기 문은 다시 열기가 힘들다고 했다.


승무원은 내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외국여행이 처음이던 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와주던 노신사도 “햄버거” 이야기를 들은 후 다시 내 쪽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스튜어디스는 내게 영어로 뭔가를 한참 설명하더니 마지막에 “ Is it Ok?” 이런다.

이건 나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래서 대답했다. “OK..”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고 잠시 후 비행기는 문을 닫았다.

"으잉??"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문을 닫고 나서 30분이 지날 때까지

비행기가 출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상태로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비행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옆자리가 두 개나 빈 넓은 좌석에 앉아 멀뚱멀뚱 창밖의 야경을 보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49457345.JPG


돌아오는 중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비행기 못 탄 그 친구들은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낼까?”

“한국에 도착하면 그 녀석들 짐은 어떻게 챙겨야 하나?”


“비행기 문을 닫고도 거의 1시간이나 출발이 늦어졌는데

항공사는 왜 손님들을 버리고 출발했을까?”

“만약, 내가 저 스튜어디스에게 조금만 설명할 수 있었다면

10분 정도는 더 기다리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노신사는 햄버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등등.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시간이 지났고 비행기는 별일 없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는 곳에서 항공사 직원에게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동료들의 짐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물었다.


직원이 사무실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와서는,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째 비행기가 많이 늦게 출발했더라고요.”

“친구 분들 짐은 한국으로 안 왔습니다. 그분들 짐 다시 짐칸에서 내리느라

비행기가 늦게 출발한 겁니다. 친구분들에게 연락해 보면 짐은 이미 찾았다고

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결국 내 동료들 짐을 내리느라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늦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들을 그냥 태웠으면 훨씬 빨리 출발할 수 있었을 텐데 항공사는

왜 시간을 끌면서 짐을 내렸을까?


내가 동료들이 공항에 왔다고 몇 마디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으면

비행기가 10분 정도는 더 기다려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동료들과 함께 공항에 왔다고 분명히 말을 했었는데,

그 노신사는 승무원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내가 큰 소리라도 좀 치고 억지라도 부렸으면 시간을 조금은 벌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Ok, Ok"만 하니 그냥 문을 닫았던 것은 아닐까?


내가 “Please, Just wait 10 minutes” 한 마디만 할 수 있었어도.....

아니 그냥 "Please"나 " Sorry"만 할 수 있었어도 뭔가 바뀌지 않았을까?


수많은 의문이 뭉개 뭉개 피어났지만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젠장! 이게 다 영어 때문이다.

"영어" 이 녀석은 내 인생에서 항상 발목을 잡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