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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에필로그, 두 개

#16. 에필로그

by 벼랑끝

[세부(Cebu, Philippines) 남부 투어]

#16, 에필로그 01


몇 년 전 세부 섬 남쪽을 여행한 적이 있다.

되는 일이 없어 앞날에 막막하던 때였다.

이른 새벽 아무런 계획 없이 집을 나섰는데,

출발하고 보니 차는 자주 다니던 섬의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해가 뜨고 배가 고파질 즈음 “네그로스 바이스 시티”에 사는 지인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통화를 하게 됐고 나의 "세부(Cebu, Philippines) 남부 투어"가 시작됐다.


지도 한 장 없이 출발한 여행이라 고생은 좀 했지만(실제로 죽을 고비도 넘겼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여행이었다.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이었고, 오랜만에 즐긴 자유였다.

자주 가던 곳이었지만 평소와 다른 사람들을 만났고 다른 것을 봤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핸드폰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때 찍은 사진들을 발견했다.

당시의 사진을 보니 여행기를 써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묵었던 호텔 창 밖의 아이들


"여행은 기록과 함께 끝나고, 기록은 사진에 의해서 완성된다."는생각을 하면서 산다.

몇 장이지만 기억을 살려주는 사진이 있으니, 홀로 했던 자유의 시간 "세부, 남부 투어"를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자고 마음먹고 보니 글이 잘 정리가 안 됐다.

가이드 일 할 때 경험을 살려서 여행지 소개를 하려는 욕심이 들어가면서 글은 중구난방이 됐고,

카메라를 들고 시작한 여행이 아니다 보니 사진 자료도 턱 없이 부족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4년째 쓰고 있던 LG폰이 뒷 뚜껑이 벗겨져

투명 테이프로 붙이고 다녔는데 그 테이프의 한쪽 끝이 카메라 렌즈를 덮고

있던 것을 여행이 끝나고야 알았다. 그래서 모든 사진이 초점이 흐려져 이상하게 찍혔다.


이 여행기는 몇 편을 인터넷의 모 게시판에 연재하다 멈췄다.

어설픈 자아도취에 빠진 글은 재미도 없었고 내용도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그렇게 쓰다만 초고들은 내 컴퓨터 하드에 담긴 채 2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런데 이놈의 시답잖은 미완성 여행기의 '바로가기' 아이콘이 컴퓨터를 켤 때마다 바탕화면에서

비웃듯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지막 날 묵었던 호텔 창 밖


“야! 너 그거 왜, 안 끝내냐?"

"그럴 거였으면 게시판에 올리지나 말지 몇 편 올리다 마는 건 뭐냐?”


“야, 그 글 몇 명이나 봤다고 그래?”


“야!! 몇 명 안 봤으니까 중간에 니 맘대로 끊어도 된다는 거냐?

"그럼 글을 지워!!!"

"쓰다가 마는 건 뭐냐? 무책임하게.... "


"그거 못 끝내니까 다른 것도 못하잖아,

숙제는 끝내고 딴짓을 해야지....

너 도망 다니는 거 이 세상에 한 명은 알아.... 바로 너!!”


이런 회초리 같은 목소리가 아이콘이 눈에 띌 때마다 들려왔다.

못 들은 척 눈을 돌리고 외면했지만 신기하게도 '바로가기'를 지울 수는 없었다.


오슬롭 아이들


그러다가 팬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바로가기'를 다시 클릭했다.

2년 넘게 바탕화면에서 날 괴롭히던 이놈의 여행기를 드디어 클릭한 것이다.


남아 있던 메모와 사진을 보면서 지극히 이기적인 글로 화면을 채웠다.

오직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며칠 동안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지지고 볶아 드디어 마무리를 지었다.


이걸 자랑이라고 ‘에필로그’까지 쓰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나는 뿌듯하다.

오래된 숙제 하나를 끝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마지막 편을 쓰고는 혼자 별의별 욕을 다 했다.

나 자신이 대견했던 것 같다.


"이 자식아, 봤지? 이제 끝냈어!!

흥, 나 이런 사람이야!! 푸하하~~~"


이놈의 지긋지긋한 ‘남부 투어 여행기’ 이제 공식적으로 뚜껑을 닫는다.

속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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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02]

세부 남부투어 여행기를 끝내며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큰 걸 바라며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자본주의 세상이 만들어낸 우울증이 찾아올 때면,

예전의 글을 찾아 읽고 고치고를 한다.


우울증의 전조 증상이 보이기 시작하면 짧은 기간 완성할 수 있는 만만한 일을 찾아

끝내려 노력한다. 작은 것이라도 마무리를 지으면 뭔가를 끝냈다는 정신승리 때문인지

자존감이 상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신승리는 지금까지는 내 삶을 유지하데 꽤 도움이 됐다.

이 글도 그중 하나다. 나의 정신승리를 위한 산물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 고쳐 쓰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남들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나라 내가 읽어 즐거운 글을 쓴다.

이 여행기도 생각날 때마다 클릭하며 수시로 고쳐 쓰기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은 꼴도 보기 싫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이 말을 더더욱 믿고 싶다.


"人生で素敵なことは、だいたい最後のほうに起こる"

(인생의 멋진 일은 대부분 후반부에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은 내 인생의 후반부를 위해 많은 기록을 남길 생각이다.

지금 내가 이 여행기를 읽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후일 내가 남긴 기록들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할 수 있으면 더 좋은 일이고......





(부록)

본문에는 올리지 않았던 "일본 자살 방지 광고".


https://youtu.be/52 vp6 nGqYOA

(일본 자살 방지 광고)


人生で素敵なことは、だいたい最後のほうに起こる

인생의 멋진 일은 대부분 후반부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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