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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Aug 08. 2021

(새해 계획) 지금이 문제가 아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을 위하여....

새해 계획


‎“다사다난(多事多難)”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국어사전에는 한 단어로 "어려움"이라 정리되어 있다.


2020년은 인류에게 손꼽히게 어려운 한 해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나는 올해(2020년)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타국에서 전 재산을 잃고 쫓겨나다시피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지난해를 "이 정도면 선방했다."라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할 소리다.   

나는 이미 4년 전에 쫄~딱 망했었다. 물론 빚도 왕창 졌다. 

따라서 작년(2020년)에는 가진 것이 없으니 상대적으로 잃을 것도 없었다. 


4년 전 이맘때 나는 10년 가까이 살던 세부를 떠나 “민다나오 섬”에 있는 

헌 옷 수입상의 창고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세부(Cebu)를 떠난 이유는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면, 내가 누구를 죽였거나, 

누군가가 날 죽였거나 둘 중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민다나오: 필리핀 남쪽의 이슬람교 지역, 외교부 여행 금지구역으로 아직도 반군들이 정부군과 총격전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산적들이 출몰하기도 한다. 나는 '제너럴 산토스' 근처 마을에 머물렀었다.)


당시 내가 세부에서 안 좋은 상황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자 민다나오에서 의류 수입업을 하던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있을 곳이 마땅찮으면 자기에게라도 와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두말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그때의 나는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후배는 의류 창고 지붕 밑이자 사무실의 천장 위에 있는 좁은 공간을 거처로 내줬다. 

높이가 1.4미터 정도 되어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공간이었는데, 

자신이 처음 그곳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숙직실 겸 휴게실로 쓰던 곳이라고 했다.


한국의 70~80년대에 지붕 밑에 존재했던 다락방을 본 사람들이라면 어떤 곳인지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날 집에는 지붕과 방 천장 사이에 철 지난 옷이나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수납공간인 

'다락'이 있었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주로 삼촌이나 장남들이 잠자리로 그곳을 사용했다. 


나는 그 다락방에서 52일을 머물렀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민다나오는 세부보다도 훨씬 남쪽이다. 

이 말은 적도에 매우 가깝다는 뜻이고 엄청나게 덥다는 뜻이다.

낮에는 지붕이 너무 달궈져서 무조건 방을 나와야 했고, 밤에도 그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아  

그 공간에서 시간을 버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곳이 싫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꽤 좋은 시간을 보냈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얼핏 듣기에는 사기꾼 도망자가 되어 우범지역 창고의 다락방에서 남들 눈치나 보며 숨어

지낸 것 같지만 실제 내 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해가 뜨면 창고로 내려와 직원들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고,

저녁이 되면 두리안 따위를 사 먹으며 한가하게 저녁 산책을 하거나 동네 구경을 다녔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잠들기 전까지 사무실 컴퓨터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고 가끔 

글쓰기 연습도 했다. 


거기 있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살면서 처음으로 해 본 '멍 때리기'였다. 

얼마 안된 나이지만 나는 생존을 위해 언제나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야 했다.

내 삶은 늘 잠이 부족했고, 돈이 부족했고, 사랑이 부족했다. 

항상 쫓기며 살았고, 압박감과 열등감은 내 뒤를  쫓아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민다나오에서 창고 생활을 하면서 그런 것들로부터 조금씩 해방될 수 있었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그곳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은 해야 할 일도 없다는 뜻이다.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친구가 있었기에 돈 걱정은 없었고,

직원들은 내게 무척 친절했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내가 처음 그곳을 찾아갔을 때 후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형, 푹 쉬다 가요. 우리 애들 밥 먹을 때 눈치 보지 말고 같이 먹어요. 

애들이 사장 친구라고 잘해 줄 거예요. 

여기는 한국 슈퍼나 한국 식당 같은 거 없어요. 

그러니 먹는 건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저도 여기 있었을 땐 애들하고 똑같이 먹어요.  


저는 다음 달에 한국 들어가면 2주 정도 못 올 거예요.

창고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닫을 거고요.  

혼자 잘 지낼 수 있죠?"


그 친구는 내가 세부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별로 묻지 않았다. 

세부를 출발하기 전 전화로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는 했지만 궁금한 것이 꽤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착한 후부터 그곳을 떠날 때까지 친구는 그다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주로 했고, 창고 업무나 먹고사는 걱정, 실없는 농담 따위만 나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세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그곳 생활이 익숙해질수록 분노나 원망, 후회 같은 과격한 감정들은 조금씩 사그라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후로 4년이 지났다. 

전 세계는 코로나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휩싸였고, 

나는 십여 년을 살던 필리핀 세부를 떠나 지금 서울에 와 있다. 


솔직히 나는 코로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정부의 방침만 잘 따르면 코로나 위기는 문제없이 넘어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따라서 지금 나의 서울 생활은 4년 전 민다나오의 창고 생활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비교적 여유 있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민다나오에서의 52일을 보낸 후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잠시 설명해 보면, 나는 세부로 돌아갔고, 

알던 지인의 소개로 다시 가이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단, 6개월 만에 그간 내 발목을 잡던 빚들을 모조리 청산했다. 

내 주변에 있던 모든 채무 관계를 팀이 끝날 때마다 현금을 싸들고 가서 깡그리 정리했다.  


여행사 일을 오래 했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수익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민다나오에서 돌아온 후 매번 대박을 터뜨렸고 덕분에 자신감도 많이 회복됐다. 

물론 계속 일이 그렇게 잘 풀린 것은 아니다.


얼마 후 또다시 내리막길을 탔으니 뭐 끝이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생사에는 '굴곡'이 있으니 절망적인 일이 생겨도 버티다 보면 길이 열린 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나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인간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부딪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멀리 두고 

피해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도 경험했다. 또한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시간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사실 역시 배웠다.   


2021년이 시작된 지 한 달이 가까워 오고 있다. 

현시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이 사태가 끝날 즈음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어야 하냐는 것이다. 


아마도 2021년 말이 되면 지금의 사태는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4년 전 52일간의 민다나오 생활과 지금 내 앞에 남아 있는 

서울에서 보낼 1년은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다나오에서는 '무계획'이 계획이 되어 다음 행보에 길을 열어줬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몸이 편한 것은 비슷하지만 

한국에서는 계획 없이 무작정 휴식을 해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동안 외국에 있으며 한국에 오면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내게 주어진 1년간의 서울 생활에 대해서 조금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생각이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은 계획 중 몇 개라도 성공할 수 있다면 내년 이맘때는 조금은 행복한 

모습으로 현시점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민다나오에서의 생활이 끝났을 때 조금은 정돈된 모습으로 세부로 돌아왔던 것처럼, 

서울 생활 1년 후가 되는 2021년 12월에는 뭔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를 바란다.


모두 희망찬 새해 계획들 열심히 세우시라.

진짜 새해는 설날부터 시작이라는…….


(이 글은 음력 마지막 날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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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좋은데, 

일단 하기로 했으면 생각은 그만해야 한다... 영화, Rookie(200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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