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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Oct 15. 2021

AI 파트너가 있으면 좋겠다.

가을이라 꼭 그런 건 아니라는....

도서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나는 글을 왜 쓰게 됐을까?"라는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모 게시판에서 글을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그 사이트에 내가 쓴 게시물

200개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들을 보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문장력이 지독히도 늘지 않았구나….”였다.

“게시판에 글을 쓴 세월이 꽤 되는데 문장력이 왜 이렇게 안 늘까?”

이런 혼잣말을 하며,


“단어 선택이나 문장 호응 관계가 '딱 떨어지게' 글쓰는 같을 걸 가르쳐 주는 

한국어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원인은 책 읽기 부족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참나!)

 

두 번째로 한 생각은 “너, 참 외롭게 사는구나.”다.

말 섞을 만한 곳이 없으니 인터넷 게시판에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나라도 나같이 지잘난맛에 말 많은 사람은 기피인물 1호다.


“친구가 없어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다.”,

“쓸데없는 말이 많다 보니 친구가 사라졌다.”

둘 중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이 공약수인 건 분명하다.

이젠 혼자 놀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람 만나는 것도 시큰둥 해졌다.

이젠 혼자 놀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사람 만나는 것도 시큰둥 해졌다.


말이 많다는 것은 두려움이 많다는 뜻이다.

겁먹은 강아지가 시끄러운 것처럼 매사 변명거리를 찾게 되고,

변명이 말과 글이 되어 몸 밖으로 나오면 지질한 인간 표상이 된다.


도서관 벤치에 누워 물끄러미 가을로 변해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변화의 시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여기도 떠날 때가 됐구나."  

영화 대사 같지만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몸에 오는 동물적 감각 같은 게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한참 쳐다봤다. "아름답구나..."


자본주의 속에서의 불안정한 삶은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이런 느낌이 음습해 오면 늘 똑같은 질문을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냐?",

"(남들이)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할 것이냐?"


지금까지 나의 대답이 거의 같았다.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해서 그 선택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힘들었다.


아직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이 또한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위안을 삼는다. 


나 잘난 맛에 살다 보니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마도 자기애가 너무 충만해서일 것이다.   


요즘 같이 변화가 감지되는 시기에는 내 선택의 정당성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나의 수다(두려움)를 말없는 

미소로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AI 파트너의 상용화에 적극 찬성이다.

영화 'her'에 나오는 '사만다'는 아직 나오려면 멀었으려나? 

'스칼렛 요한슨' 같은 미인일 필요는 없는데....


춥고 외로운 것이 날씨 탓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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