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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Feb 21. 2022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최종장을 맞아

進撃の巨人,  'Attack on Titan'

이 그림을 본 것은 2013년 가을이었다.

흑백 프린트로 뽑은 조잡한 그림이 DVD 타이틀의 표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고를 때 포스터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쉽게 말해서 포스터가 멋지면 웬만하면 영화를 본다는 뜻이다.

그날 내 눈에는 이 흑백사진이 무척 멋져 보였다.

그건 "진격의 거인"에 대한 나의 긴 여정의 시작점이었다.  


재밌는 영화를 고르는 일반적인 방법은  

첫째, 박스오피스(입소문)의 흥행 기록을 따르는 것이고,

둘째, 자신의 취향에 맞는 감독의 작품을 찾는 것이고,

셋째,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고르는 것이다.


나처럼 포스터 멋있다고 영화를 보면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기 딱 좋다.  

하지만 내가 이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이것도 확률이 그리 나쁘진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박스오피스(입소문)는 거품인 경우가 많고 좋은 감독도 가끔 삑사리를 낸다.

배우야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나처럼 포스터로 영화를 골라 보는 것도 성공률이

그리 나쁘다 할 수 없다.


"The Book Of ELI, 2010 (일라이)", "Ex Machina, 2015 (엑스 마키나)", 'UNFAITHFUL, 2002(언페이스풀)'

같은 영화들은 포스터에 끌려 봤던 영화들인데 나는 꽤나 만족했었다.

물론 이 포스터들이 멋져 보이는 건 나만의 취향일 가능성이 높다.   


The Book Of ELI, 2010 (일라이)


Ex Machina, 2015 (엑스 마키나)
Unfaithful, 2002 (언페이스풀, 2002)


내가 처음 "진격의 거인"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작품을 접한 것은 '세부'에 있을 때였다.

2013년 '세부(Cebu, Philippines)'는 여행객과 가이드들이 매일 전쟁을 치를 때이다.

해외여행의 문턱이 낮아지며 항공사들은 끝도 없이 항공편을 늘였고 여행사들은 말도 안 되는

저급한 '패키지 상품'들을 쏟아냈다.


자유여행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때라 가이드들은 쏟아져 오는 패키지 관광객을 소화하기

위해 한 달에 하루도 못 쉬고 일을 해야 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바쁜 일상을 보낼 때는 쉬는 시간이 생기면 꼼짝 않고 집에 틀어박혀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손님을 한국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한국 슈퍼에서 주전부리와 DVD 영화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날도 퇴근길에 한국 슈퍼에서 DVD 코너를 뒤지고 있었는데 딱히 볼만한 신작 영화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은 헛탕이다 생각하고 돌아서는데 구석에 버려지듯 숨어있는 

흑백 표지의 먼지 낀 DVD 케이스가 보였다.

 

나 : “사장님, 이거 뭐예요?”

사장: “몰라, 그거 한국에서는 유명하다는데 여기서는 아무도 안 찾네.”

나 : “이거 제가 가져 갈게요..”

사장: “그래? 그럼 1장 값만 내고 2개 다 가져가. 그거 2개짜리야.”

나 :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가져온 것이 “진격의 거인, 1기 1~8편”이 담겨있는 DVD 타이틀이었다.

그날 밤 나는 3시간여를 꼼짝도 않고 그 충격적인 애니메이션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한참을 그 작품에 대한 검색을 했고, 주제곡을 다운로드하여 몇 번을

돌려 들으며 그 세계관에 흠뻑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한 전율이었다.


https://youtu.be/KOTN-3_y6W8

진격의 거인, 1기 1st 오프닝, 홍련의 화살(紅蓮の弓矢)    <<심약한 사람 클릭 금지>>


https://youtu.be/PfH_Lk9gpZo

진격의 거인, 1기 2nd 오프닝, 자유의 날개(自由の翼)  ((독일어로 가사를 쓴 거 보면 일본 애니메니션 감독들은 정말...))


내가 이 시리즈에 이렇게 까지 깊이 빠져든 것은 아마도 첫 시즌에 나온 이 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인 '에렌'과 엄마, 아빠와의 대화이다)

엄마: 벽 바깥으로 나갔던 인류가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알기나 해?

에렌: 나도 알 거든.

엄마: 그런데 왜?


아빠: 왜,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거니?     

에렌: 알고 싶어! 바깥세상이 어떻게 돼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을 벽 안에서 지내는 건 싫어!

게다가 계속 노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지금껏 죽어간 사람들의 목숨은 뭐가 되겠어!


아빠: 그렇구나. 배 떠날 시간이네, 슬슬 가볼까?

엄마: 여보! 에렌 좀 설득해 줘요!     


아빠: 카를라, 인간의 탐구심이란 건 누가 뭐라 한다고 억누를 수 있을 게 아니야.

에렌, 돌아오면 쭉 비밀로 해왔던 지하실을 보여주마.


참고로, 에렌의 아버지는 이 말을 남기고 나간 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10여 년 전 나는 이 대화에 왜 그렇게 자극을 받았을까?  

도대체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는 “벽 밖의 세상”이라는 말에 꽂혔지 싶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출하듯 떠났던 내 삶과 "에렌"의 호기심(탐구심)을

동질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내 행동이 합리화할 수 있을 테니까.


'진격의 거인'은 13년에 걸쳐 4 시즌까지 연재물 140회, 단행본 34권, 에니매이션 80화가 공개됐다.

2022년 현재 진행 중인 TV시리즈는 앞으로 에피소드 10여 편 정도만 더 나오면 끝난다고 한다.

만화책의 판매 부수는 누계 1억 부가 넘어 2000년 이후 발행된 일본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렸다.


일본의 만화 작가들은 오랜 기간 연재 하는 걸로 유명하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세계관의 구성이 거대하고 등장인물이 많아 이걸 엮다 보면
이야기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면 극의 속도감은 떨어지고 설정에는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게 부족한 작품들은 결국 투자자와 독자가
 줄어들어 대중의 눈에서 사라진다. 

“진격의 거인”도 많은 떡밥과 기괴한 설정 때문에 처음 접했을 때는 마무리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작가는 처음부터 모든 플롯을 정하고 글을 쓴 사람처럼 거의 완벽하게
세계관을 정리해 냈다. 그는 가상의 대륙과 나라를 만들었고 그 나라에 역사와 정치, 경제,

문화를 부여했다. 많은 사회 문제들을 재구성해냈고 문자까지 만들었다.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잔인한 전투 장면과 비인간적인 내용 그리고 기괴한 작화는 큰 거부감을 준다.  
특히, 한국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 많다. 심약한 사람은 아마 첫 화도 보기 힘들
것이다. 아마 '좀비'물을 처음 본다면 이런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한 번은 누군가에게 이걸 소개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적이 있다.
“미쳤냐? 뭐 이딴 걸 보고 있어?” 이런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친구는 1화도 끝까지 못 봤다고 했다. (1화가 좀 충격적이기는 하다.)

그 후 나는 누구에게도 “진격의 거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인이거나 일본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없는 사람은 이 

작품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진격의 거인"의 내용을 간단히 세 문단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1)  벽이 있다.

아주 높고 오래되고 누가 만든 지 모르는 튼튼한 벽이다.

이 벽 안에서 수백만의 사람이 왕국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

벽  밖에는 식인을 하는 ‘거인’이라는 희귀한 존재가 살아서 아무도 나갈 생각을 못 한다.

시즌 1의 첫  편은 벽의 문이 파괴되어 거인들이 벽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2)  ‘에렌’이라는 주인공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은 본능적으로 벽 밖의 세계를 동경한다.

그는 친구로부터 ‘바다’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을 듣는다.

에렌은 거인의 공포를 뚫고 벽 밖의 세상 그 ‘바다’라는 곳을 가고 싶어 한다.


3) 진짜 적은 따로 있다.

수많은 희생과 노력으로 인간은 거인을 물리치고 드디어 바다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 너머에는 인간 세상이라는 또 다른 적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인간들의 이기심에 의해서 역사가 조작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 적은 거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고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한다.


7년 만에 바다에 당도함


나는 시즌 3가 끝날 때 예렌이 동료들과 바다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이 드라마가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인간이 만든 비극의 역사가 어떻게 도돌이표를 찍는 지를

마지막 시즌에서 보여줄 것을 암시한다. 시즌 4로 넘어가는 이 전개를 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정말 질려버렸다.



나는 지난 13년 간 직종을 네 번 바꿨고 여덟 번 직장을 옮겼으며 열 번 정도 이사를 했다.

마지막에는 급기야 나라까지 바꾸며 거처를 옮겼다. 내 입장에서 13년이라는 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고 많은 것이 바뀐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가가 13년 동안 한 작품을

스토리텔링 하며 끌고 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을 못하겠다.


"닥치면 다 해, 돈만 주면 뭘 못해? 돈이 없어 못하지 돈만 줘 봐 뭘 못하겠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던데, 정말 돈만 주면 모든 게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말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작가에 대한 모욕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짜증 나고 불쌍하다. 창작의 영역은 돈으로 안 될 때가 많다. 동기 부여야 되겠지만 

동기가 부여된다고 걸작이 나오지는 않는다.


지난 10여 년간 작가는 아마도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플롯과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어도 전개가 쉽지 않다는 건 창작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걸작이 탄생되기 위해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작품의 완성에는 끈기와 성실이 가장 중요하다. 작가(이사야마 하지메, 諫山 創)의 

끈기와 성실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연재는 이미 끝났지만 나는 아직 이 드라마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지 못한다.

만화책으로 본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만 이 작품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하며 마지막 애니메이션 10편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처럼 아름답게 마무리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작가는 연재가 끝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금단현상 같은 거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내가 작가라면 13년간 연재하던 작품이 끝나면 허탈감에 심한 압박 같은 걸 느낄 것 같다.
마감할 원고를 제 날짜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그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13년 동안 하던 똑같은 행동을 이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강박은 생기지 않을까?
그는 정신적 불편함 없이 편안한 휴식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런 천재적인 작가들 덕에 예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사람은 지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긴 시간 동안 이런 작품을 즐길 수 있게 해 준 작가와 모든 스태프들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동안 정말 수고하셨어요."

"지난 13년간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진격의 거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 諫山 創




진격의 거인, 작가 및 애니메이션 감독과 성우, 스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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