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야기] 헤어질 결심...

제주 2022

by 벼랑끝

[제주도 이야기] ### 헤어질 결심...

(제주, 2022)


집안을 최대한 지저분한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일주일쯤 전에 청소기를 돌렸으니 아마 먼지도 꽤 쌓였을 것이다.

집에 아무도 올 사람이 없으니 이 상태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샤워를 밖에서 하고 오니 집에서는 딱히 씻을 일이 없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면 방바닥의 빈 틈을 찾아 침대로 진입해서 하루를 끝낸다.

침대를 사용해서 좋은 점은 바닥을 어질러도 침대에만 누우면 편히 잘 수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침대 위에도 옷들이 쌓여 있지만 침대가 넓어 한쪽으로 밀어 놓으면 잘 때 발을

올릴 수도 있고 나름 좋은 점이 있다.


사실 집이 이 꼴이 된 데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내가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어도 이 정도까지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도 아니다.

적어도 남들보다는 깨끗이 해놓고 산다고 자부했는데 어느 순건 그게 무너져 버렸다.


일주일쯤 전 과도한 '사람 노동(?)'으로 집에 돌아와서 쓰러진 일이 있다.

낮시간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지 퇴근해서 집의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쓰러져 2시간여 동안 꼼짝을 못 하고 엎어져 있었다.


커피도 별로 안 마셨는데 각성의 끝에 서있는 사람처럼 온몸의 신경은 날카롭게 경직됐고

입에서 계속 욕이 흘러나왔다. "세부 같으면 이럴 때 마사지를 받으러 갔을 텐데" 이런

헛소리를 하면서 비몽사몽 상태로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두 시간쯤 후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간단한 요기를 준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어라?" 컴류터가 부팅이 안 되는 게 아닌가? 얼마 전부터 뭔가 문제가 있는 듯

좀 버벅대긴 했지만 일단 부팅만 되면 쓰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예 부팅이

안 되면서 C드라이버를 체크한다는 숫자만 자꾸 올라갔다.


결국, 그 밤에 컴퓨터의 본체를 분해했고 RAM과 C드라이브를 교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휴대폰으로 부품 주문을 넣고 돌아보니 분해된 컴퓨터 부품과 공구 및 잡동사니들로 방은 엉망이었다.

이게 방이 망가지기 시작한 시작점이다.


"어차피 컴퓨터 부품이 오면 또 어질러야 할 테니 지금 치워봐야 소용없잖아"

이딴 소리를 하며 그날은 그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조금쯤은 치울 수 있었는데 낮에 일 때문인지 더 이상 손도 까딱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후 내 방은 널브러져 있는 컴퓨터의 부품들과 함께 뭔가가 자꾸 쌓이기 시작했다.

며칠 뒤 컴퓨터 부품이 도착할 즈음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 요리조리 피해 다닐 정도가 됐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컴퓨터를 다시 조립했는데도 방이 깨끗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저분한 방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 젖은 여인의 마스카라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들었다.

"헤어질 때가 됐다는 뜻인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한심한 생각에 조언을 구하려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뭘 어디서부터 손 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래 엉망인 건 한 번에 정리가 안 돼."


"어떻게 할까요?"

"쉬운 거부터 해"


"뭐가 쉬운 건데요?"

"잔머리 굴려서 순서대로 하려니까 시작이 안 되는 거야, 그냥 눈앞 보이는 제일 큰 거부터 치워"

"그럼 나중에 또 다시 정리해야 하잖아요?"


"맞아 나중에 다시 하면 돼. 그러니까 아무 데나 다 때려 넣방 청소부터 해.

'나중에 또 지저분해질 텐데 청소는 나중에 하자' 이딴 소리 하지 말고

일단 쓸고 닦고 청소를 해. 어차피 정리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아.

방바닥부터 정리하 서랍장, 신발장, 싱크대, 다용도실 이렇게 구역별로 다시 정리하는 거야.

두 번 일 같지만 그게 더 빨라. 그러니 일단 아무 데나 다 때려 넣어, 구분해서 넣으면 더 좋고"


"눈앞에서 없애라는 거죠?"

"맞아. 그리고 청소를 꼭 먼저 해 나중에 할 생각 말고."

"왜요?"


"간단하게라도 청소를 먼저 해야 밥도 먹고 쉴 수도 있어, 먹어야 일을 하지.

심하게 지저분할 때는 청소가 한 번에 깨끗하게 되지 않아.

그러니 1차로 조금이라도 해 놓으면 나중에 훨씬 편해."

"알았어요."


"쉬엄쉬엄 해라, 눈앞이 깨끗해지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정리에 속도가 붙을 거야."

"정말요?"


"그럼, 그래서 집 비울 때는 꼭 청소를 하고 나가는 습관을 들여야 해,

설거지나 빨래 게는 그런 거, 그래야 집에 들어올 때 기분이 좋거든."

"네, 알았어요."


"그리고, 쓸데없는 거 이번 기회에 다 버려,

물건 좀 버리면서 살아. 쌓아 놓고 살지 말고.

네가 가진 거 절반은 버려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다."

"네, 알겠습니다."


"정리는 버린다는 거의 다른 말이야, 알았지?"

"네~"


전화를 끊고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방은 그대로다.

무의식의 어떤 부분이 내 행동을 막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처음부터 청소가 하기 싫다기보다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뭔가 끝을 예감하는 느낌 때문에 고개를 자꾸 돌리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뚜벅이로 캠핑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마지막 날 텐트 정리할 때, 이 많은 게 내 배낭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때가 있었다. 사실 매번 그랬다. 그런데 꾸역꾸역 넣다 보면 어떻게든 다 들어갔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면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길을 떠났다. 가끔 배낭이 너무 무거워서 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한 번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였던 기억은 없다.


방바닥을 보면서 뜬금없이 그 옛날 야영장에서 배낭 싸던 때를 떠올린 걸 보면 본능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 보다.


"이걸 다 집어넣으면 떠나야 하는 건가?"

방 바닥을 보는데 쓴웃음이 났다.



(2022년 가을, 제주...)



사내 연애 리엑션 중.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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