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수 있는 것을 남기며 사는 것

새해 계획 - 2022년 마지막 날 쓴 글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 어학연수 이야기” 이 시리즈는 처음으로 내가 '딴지'와 인연을 맺은 글이다.

글을 쓸 당시 나는 ‘딴지일보 사이트’에 가입만 하고 게시물은 쓰지 않는 소위 ‘눈팅족’이었다.

"딴지일보"는 즐겨찾기에 올라 있지만 방문하지는 않는, 그렇다고 지우자니 뭔가 아쉬운 그런

사이트였다.


그랬던 "딴지일보"가 갑자기 가까워진 계기가 있다.

내가 가이드로 일하던 세부(Cebu, Philippines)에 패키지여행이 줄고 자유여행객이 늘면서

관광지에서 자유여행 손님을 돕는 사무실이 필요하게 됐다. 여행사는 급하게 상담 센터를

만들었고 현장에 있던 날 책임자로 보냈다. 한국인 나 한 명, 현지인 직원 2명 이렇게 셋이었다.


사무실을 열고 꽤 홍보를 했음에도 "자유여행 상담 센터(?)"에는 손님이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팀도 방문객이 없었고 그나마도 외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관광객은 이미 자유여행 업체들이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뛰어든 여행사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급조한 사무실도 수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여행사의

구색 갖춤을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홍보 사이트에 "우리도 이런 거 있소" 뭐 이런 거 한 마디

끼워넣기 위해 만든 사무실이었던 거다.


나의 일과는 출근해서 청소가 잘 됐는지 확인하고, 컴퓨터로 웹서핑을 2시간 정도 하다가 전날 업무

보고서 작성해서 지사로 보내고, 점심 먹고 잠깐 소파에 누워 자다가 오후에 또 웹서핑을 3시간 정도

하고 퇴근하는 게 전부였다.


제일 힘든 일은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당최 쓸게 없는데 그걸 매일 뭔가 한 것처럼 써서 보내는 게

보통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다. 받는 쪽도 일이 없는 걸 알고 있었기에 대충 써서 보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오늘 놀았음, 내일도 놀 거임, 모레도 놀 가능성이 높음" 이렇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내겐 이게 가장 힘든 일이었데 이 어려운 보고서 작성도 10분이면 충분했다.


꿈같이 놀고먹는 직장생활도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점점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인터넷 댓글 놀이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댓글을 달고 짧게 글도 쓰며

낄낄대며 놀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이트에 '자전거 일본 여행기'가 연재 중인걸 보게 됐다.


그걸 보다가 "시간도 많은데 나도 이런 거 한 번 써 볼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라는 시리즈였다.


계획이 생기자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일단 예전에 읽었던 글쓰기 책에서 어떻게 글을 기획해야 하는지를 참고해서 열 편 정도의

에피소드 초안을 잡았다. 생각보다 소재가 많이 떠올랐다. ‘어학연수’ 당시 해 놓았던 메모가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열 개 정도의 에피소드의 초안이 마련됐을 때 드디어 프롤로그를 정리해 "딴지일보"에서 가장

방문객이 적은 [독자투고-국제/해외] 게시판에 첫 번째 글을 올렸다. 그게 2015년 11월이었다.


당연히 읽는 사람은 몇 안 됐고 그리 반응도 없었다. 읽는 사람이 없으니 사실 글을 쓰는 부담이 없었다.

혼자만 즐기는 묘한 즐거움이 생겼다고나 할까. 사실 이때만큼 회사 생활이 즐거웠던 적이 없다.

회사는 내게 에어컨이 빵빵히 나오는 집필실과 필요한 건 영수증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게다가 수고한다고 공짜 밥도 먹여주고 덤으로 월급까지 줬으니 어떻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게시판에 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되어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딴지그룹"에서 운영하던 팟캐스트에 내 글이 소개가 된 것이었다. 당시는 바야흐로 나꼼수의 열풍을

타고 ‘팟캐스트’가 전성기를 구가할 때였다. 방송이 나가자 조회 수가 빵 터지면서 잠깐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는

[독자투고-국제/해외] 게시판에서 인기 있는 연재물이 됐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고, 에피소드가 40개를 넘어갈 즈음 일하던 사무실이 드디어 망했다.

큰 여행사가 자유여행 시장을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 큰코다친 것이었다. 나는 졸지에 다시 현장으로

나가게 됐고 더 이상 글을 쓰기 힘든 상황이 됐다. 가이드가 현장으로 나간다는 것은 한 달에 2~3일도

휴일을 보장받지 못하고 잠은 하루 4시간도 못 자게 된다는 뜻이다. 즉, 글쓰기는 종 친 것이었다.


하지만 난 그대로 어정쩡하게 끝내고 싶지가 않았다. 고정 독자들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뭔가

마무리를 짓지 않고 연재를 중단하는 건 용납이 안 됐다. 그래서 잠을 줄여가며 없는 시간을 억지로

짜내어 마지막 몇 편의 글을 급하게 완성했다.


글을 구체적으로 기획해서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 본 것은 살면서 처음이다.

글뿐만 아니라 내 의지로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실천해서 마무리까지 지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글을 올렸을 때의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시리즈를 끝내고 내겐 의외의 소득이 있었는데 그건 '정신 승리'가 사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것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보상이 없더라도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글을 마치고 알게 됐다.


그 뒤로도 "어학연수 시리즈"를 생각하며 몇몇 연재를 기획해서 시도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환경 탓도 있겠지만 꾸준히 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실패를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는 내가 그걸 어떻게 했을까?" 연재를 포기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가 게시된 지 어느덧 6년이 흘렀다.

제주도의 골방에서 2022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보며 뭔가 뜻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의 첫 번째 연재 글을 떠올렸다. 다시 읽어보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부끄럽고

엉성한 글이었지만 읽다 보니 글의 배경이 됐던 사건과 쓸 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게시판에 글을 쓰면 난감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 그 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뒤로 밀려나다가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묻혀 버린다.

글쓴이도 썼다는 사실을 잊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없어지기 일쑤고 원본은 찾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다가 사이트가 폭발이라도 하는 날이면 존재했던 사실 자체가 없어진다.


얼마 전 게시판을 검색하다가 내가 쓴 글을 보고 "내가 언제 이런 걸 썼지?" 한 적이 있다.

어떨 때는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쓴 글을 한 곳에 모아야겠다. 잘못하면 전부 잃어버리겠는데...."

이 생각을 한 후 썼던 글을 읽기 쉽게 정리하는 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찾은 방법이

'전자책'이었다.


지난주에 드디어 나의 첫 번째 연재물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를

‘브런치’라는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전자책으로 발간했다. 이전에도 몇 번 시도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아 계속 실패했었는데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개정판을 만들었다.


글을 정리하면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은 투박하고 내용은 자극적이었으며 자기 과장에 빠져

쓸데없이 흥분이 과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카톡이 없던 시대에 쓴 글이어서

뭔가 이가 빠진듯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 많았다.


전자책으로 편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이 글을 끝까지 읽을 사람은 없겠구나"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 글은 대중을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은 아니었다.

누가 읽어주기를 바라고 쓴 글이라기보다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쓴 습작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거의 두 편씩 50개 가까운 글을 빠지지 않고 게시했으니 그 성실성은 스스로도

높이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글쓰기 훈련도 많이 됐을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과거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개인사라 할지라도 기억은 왜곡되게 마련이다. 좋게든 나쁘게든 기억은 어쨌든 왜곡이 된다.

그렇다면, 나이 들어 "내가 왕년에...." 같은 헛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를 조금쯤은

제대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기록하다 보면 힘들었던 시기가 아름다운 기억이 되기도 하고, 어려웠던 일은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글을 쓰다 느낀 이런 왜곡이 내겐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쁜 기억은 글쓰기를 통해서 굳은살이 되었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는 나에게 긍정적 방향으로의 글쓰기가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다.


나는 쓴 모든 글을 10년 후의 내가 볼 것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그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미래의 큰 꿈 중 하나다.


솔직히 지난 2년은 내게 인생의 휴가였다.

이제 나는 전쟁 같은 삶의 현장으로 또다시 돌아가야 한다.

지난 2년간 지나온 시간을 정리할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10년 후에 내가 읽을 글을 정리해 놓는 것"

"사랑하는 이와 나의 후세들이 함께 읽을 것을 만들어 놓는 것"

이 정도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로 괜찮은 게 아닌가 싶다.


재작년(2020.12.31) 마지막날 밤에 쓴 글이 '딴지' 어딘가에 남아 있다. (여기)

지금 읽어봐도 그리 나쁘지 않은 재밌는 글이다.


그 글을 쓸 때를 생각하며 2022년 마지막 날 또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글을 남긴다.

"2023년 마지막 날 지금 쓴 이 글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며 보게 될까?"

아마도, "그때 제주도에 있었지..."라며, 오늘(2022.12.31)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2023년 12월 31일이 왔을 때,

좀 더 나아진 모습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행복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꿈꾼다.

이건 새해를 맞이하며 스스로에게 올리는 작은 기도이다.

또한 여기 글을 남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억할 수 있는 걸 남기며 사는 것이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덧)

1) 이 글은 2022년 12월 31일에 쓰였음.


2) 2020년 음력 마지막 날 쓴 글 (2021년 1월)

https://www.ddanzi.com/index.php?mid=colorone&page=4&document_srl=665435138


3)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딴지 원본 링크.

https://www.ddanzi.com/index.php?_filter=search&mid=doctu&filterid=pop-alert-search&search_target=nick_name&search_keyword=%EB%B2%BC%EB%9E%91%EB%81%9D..&page=6


3) [마흔 살에 떠난 필리핀 어학연수 1,2] 개정판 브런치 전자책 링크,

https://brunch.co.kr/brunchbook/40yearsold001

https://brunch.co.kr/brunchbook/40yearsold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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