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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Sep 05. 2023

[편지] 와인 그리고...

'예쁜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

OOO에게...


“예쁜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근데 이게 진도가 잘 안 나가요.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뭔가가 있는데 손끝으로 나오질 않으니 참 답답합니다.

남들은 쉽게 쉽게 잘도 쓰는 거 같더구먼. 왜 이렇게 잘 안되는지.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필력 부족’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Panglao, Bohol.  2023. 8. 30.

어제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사진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보이는 손가락이 제 겁니다.

손님들에게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고 밖으로 나가는데,


“잠깐 앉아서 와인 좀 골라 주세요.” 하는 거예요.

“저는 와인 잘 모르는데요.” 했더니,

“그럼 같이 골라 보죠.” 하네요.

그래서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맘에 드는 적당한 와인을 골랐어요. 사진에 있는 거.

그러다가 얼떨결에 저도 앉아 와인 한 잔을 비웠습니다.


기분 탓인지 술맛을 잘 모르는 제게도 이 와인은 맛있게 느껴지더군요.

‘진로 포도주’ 외에는 별로 마셔 본 적이 없는 제가 와인이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달지 않은 와인을 맛있다고 생각하기는 처음입니다.

Panglao, Bohol.  2023. 8. 30.

보홀에는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는 식당이 있어요.

근데 여길 가려면 꽤 긴 맹그로브 숲길을 통과해서 바다 위에 놓인 0.5Km쯤 되는 대나무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이 길을 걷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손님들 구두굽이 대나무 사이에 끼어 자꾸 휘청거리길래,

“그 구두 들고 가는 게 더 낫겠어요.” 했더니,

“그래야겠다” 하더니,

구두를 손에 들고는 깔깔거리며 맨발로 씩씩하게 잘도 걷더라고요.     


돌아오는 길도 꽤 힘들었을 텐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제게 와인을 골라달라고 했어요.

저보다 와인에 대해서 훨씬 잘 아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제 모습이

보기 안 좋았나 봅니다.


와인 메뉴를 본다고 앉았다가 그 자리에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참을 웃고 떠들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저녁 식사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Panglao, Bohol.  2023. 8. 30.

숙소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 그래 이거였어”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예쁜 것’과 ‘아름다운 것’의 차이를 알 것 같았거든요.


그동안 글이 진도가 안 나갔던 건 아마도 논리적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글빨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해서였지 싶습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에 살을 붙여 내 거 인양하려 했으니 잘될 턱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저녁식사 후 뭔가 논리적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걸 기초로 짧은 글이라도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 제가 써놓은 글을 보다가,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헐~~ 참 기특하기도 하여라....”  

이런 자아도취에 빠질 때도 있어요.  

'정신승리'의 끝판왕인 거죠.


근데 이 정도 정신승리도 없으면 요즘은 정말 살기 힘든 거 같습니다. 

까딱하면 진짜 노예가 될 거 같거든요.  

늘 하는 주장이지만 '정신승리'는 '정신병' 보다 삶에 훨씬 큰 도움이 됩니다. (전 그렇습니다. ^^) 


Panglao, Bohol.  2023. 8. 30.

지나고 보면 다 비슷한 날이겠지만,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과 글이 있는 건 참 기쁜 일입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뭐 그리 의미가 있는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거 같습니다.

적어도 노예로 살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여름이 다 지났습니다.

올여름은 기억이 많이 남을 거 같아요.

즐거운 추억이 많이 생겼거든요.


다음 계절도 이렇게 건강하게 지나길 기도해 봅니다.

그럼 이만...



(Sep. 05. 2023. Panglao in Bo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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