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나 같은 사람은...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자산이 된다.”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4. “나 같은 사람은 처음에 뭐부터 시작해야 하냐?”


아침에 식당에 올라가면 향긋한 커피와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난다.

아침 식사는 셀프서비스로 토스트, 계란, 커피, 주스가 뷔페 식으로 준비되어 있다.

아메리칸 스타일이어서인지 일찍 식사 시간이 끝나서인지 아침을 먹으러 오는 학생은 많지 않다.


식당은 교류와 사교의 장소이다.

만나는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정보를 얻는다.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지", "어떤 선생이 좋은 선생인지",

"수업 시간에 도대체 뭘 들고 들어가는지" 등등.


식당에서 한 학생에게 물어봤다.


- 나 : 나 같은 사람은 처음에 뭐부터 시작해야 하냐?

- 학생: 형님, 일단 단어를 외우세요. 단어를 알아야 말을 하든, 듣든 하죠.

- 나 : 그럼 무슨 단어부터 외워야 해?

- 학생: 단어장 가져오신 거 없어요?

단어장 없으면 인터넷으로 '회화용 기초 단어' 이런 거 한 번 찾아보세요.

- 나 : 알았어, 고마워..


별다른 공부 방법을 모르던 나는 인터넷으로 찾은 단어장으로 단어 외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단어 공부를 포기했다. 일단, 단어 외우기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게다가 도무지 외워지지도 않았다.


솔직히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도 영어 단어를 정말 못 외웠다.

나는 영어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40점 이상을 받아 본 적이 없다.

덕분에 무던히도 맞으면서 수업시간을 보냈기에 당시 내게 "영어"는 "두려움"과 "고통"의 동의어였다.


그랬던 녀석이 몇십 년이 지나서 덜렁 단어장을 들고 단어를 외운다고 외워질 턱이 있겠는가?

1시간 전에 외운 단어는 고사하고, 10분 전에 100번쯤 읽고 쓴 단어가 기억나지 않으면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일주일쯤 온통 포스트잇을 사방에 붙이고 연습장 갈아치우기를 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건 아니다.”


뭔진 몰라도 분명 이렇게 무작정 단어만 외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단어 공부를 포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니 전 보다 더 의기소침해졌고 불안은 더 깊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원 생활은 익숙해졌지만 혀는 여전히 더 딱딱했고 눈치나 보는 어색한 허수아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특히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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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본 북쪽 풍경)


그런 내게 학생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 학생들 : 형님, 그러다가 한 방에 빵! 터지는 수도 있어요.

계속 열심히 하시면 돼요.

- 나 : 응, 고마워. (근데, 뭘? 열심히 하면 되냐고?)


문제는 "열심히"가 아니고 "뭘(무엇)?"이었는데 그걸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거나, '영어'라는 것은 애당초 내가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해줬는데 내 귀에 안 들렸을 수도 있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수업에 빠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방으로 돌아올 때의 피곤함과 자괴감은 형언이 안 될 정도였다.

한국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는 그 시간이 너무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한 번에 빵’ 터진다는 말은 학원에 전설처럼 떠도는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되고 싶으니. 그런 헛된 믿음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는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말은 일견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1:8 프랭크 선생 수업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 나 : 어떻게 하면 단어를 잘 외울 수 있나?

- 프랭크 : 왜 단어를 외우려고 하냐?


- 나 :............., (으잉? 단어를 외워야 말을 하든 글을 쓰든 하지)

- 프랭크 : 나는 한국 학생들이 Vocabulary33000 이런 거 들고 다니는 거 보면 이해를 못 하겠다.


- 나 :??........, (뭔 소리여? 당연히 영어 공부하려고 들고 다니지)

- 프랭크 : 과연 미국인 중에 Vocabulary33000 책의 단어를 다 익히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너는 한국어 단어 33000개 외우냐?


- 나 :.......(아마 외우지 않을까? 근데 왜? 자신이 없지?.....)

-프랭크 : '말'을 배우고 싶으면 '말'을 배워야 한다. 미국 어린애들은 단어 안 외워도 말 잘한다.

외우지 말고 그냥 말로 익혀라.


- 나 :...... (그런 말 누가 못해, 그건 한국 영어 선생들도 다 하는 소리다.

그런데 어떻게 말로 익히냐고? 해법을 주세요. 해법을!!)


마침 그날 프랭크와 나 그리고 다른 학생 한 명 이렇게 3명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날 프랭크는 꽤 길게 이 이야기를 했는데 옆의 학생이 통역을 해준 걸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1:1 대응으로 꼭 맞는 뜻을 가진 단어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동사나 형용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명사마저도 그렇다.

특히, 동사는 한 가지 해석으로 외우면 회화에서 적절히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차라리 실생활 회화에 사용되는 문장을 통째로 외워라.


단어들을 한 가지 뜻으로만 외우려고 하면 회화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기가 어렵다.

생활 회화에서 쓰는 단어는 사전과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

한국 학생들과 대화하다 보면 실생활에 쓰지 않는 문학적(어려운) 단어를 쓰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미권 사람들이 회화에 쓰지

않는 단어들을 쓰니 대화가 어색하다.


단어를 하나씩 때어서 사전적 의미로 외우지 말고 “아하, 이런 느낌이구나!" 정도로

문장 속에서 이해만 해라. 많이 쓰는 단어는 어차피 잘 잊어먹지 않는다.

회화용 단어들은 사전적으로 용례가 다양하기 때문에 단순히 외워서는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회화를 하고 싶다면 단어를 외우려 하지 말고 쉬운 영어 소설이나 드라마 대화집 같은

걸 소리 내서 읽는 게 훨씬 낫다. 전문적인 통역이나 번역이 아니라 말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단어 외울 생각하지 말고 쉬운 문장을 통째로 로 외워라. 그런 문장 노트를 만들어라.


단어 때문에 대화가 막히면 그때그때 옆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찾아서 적으면 된다.

그러라고 선생이 있고 사전이 있는 거다. 대화 중에 궁금해서 찾아 외운 단어는 잘 안 잊어 먹는다.

원래 많이 쓰는 단어일 가능성이 많고 아쉬울 때 외운 단어이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는다.


단어를 몰라 완성 못했던 문장은 단어를 적는 게 아니라 문장을 통째로 적어 놓는 게 좋다.

짧은 문장부터 통으로 외우면 단어의 느낌(사전적 뜻이 아님)은 자연스럽게 익혀진다.

그렇게 익혀진 단어는 다른 문장에서 쉽게 쓸 수 있다.


그날 프랭크가 한 말을 통역해준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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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후 통역해준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 학생 : 형님 저건 프랭크 생각이고요. 우리 한테는 안 맞는 말이에요.

일단 단어는 무조건 많이 외워야 합니다. 어학은 "단어와 문법" 이 두 가지가

모든 걸 좌우해요. 문학적 어감이든 회화적 어감이든 관계없이 단어를 많이

외우다 보면 그게 실생활 회화에 당연히 반영이 됩니다.


문장을 외우면 뭐 해요. 단어와 문법을 모르면 매일 그 말만 하고 살아야 하는 데.

문장을 다양화하려면 결국 단어를 외우는 수밖에 없어요.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영어를 쓰는 환경에서 자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우리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우리 같이 ‘토익’이나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한텐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 나 : 음, 알았어. 오늘 고마웠어..


방으로 돌아오니 머리가 복잡했다.

프랭크 선생의 말이나 학생의 말이나 다 맞는 소리 같았다.

잠시 앉아서 생각을 해보고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답은 두 개 다 일 수 있다. 아니 여러 개일 것이다.

문제는 "내게 맞는 답이 무엇이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생이 말한 단어 외우기 방법은 해봤다. 그리고 실패했다.

학생의 방식이 틀렸다기보다 그건 내게 맞지 않는 방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난 암기력이 무척 떨어지는 사람이다. 덕분에 무척 괴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고

영어에 대한 열등감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니 이제 방법을 바꿔서 프랭크 방식을 해 볼 차례다.

지금까지 나는 '영어로 말 배우기'를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학창 시절에 했던 영어 공부는 '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시험을 위한 공부였다. 그러니 이제 내가 '말 하기' 공부를 할 마음을 먹었다면

프랭크의 조언을 따라 볼 필요가 있다.


문장을 통째 외우든 단어를 하나씩 떼어내 외우든 암기를 하는 것은 똑같지만 단어와는

다르게 문장은 적어도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단순 암기를 못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조금은 쉬울 수도 있다.(그렇기를 바라보자!!)


"일단 프랭크 선생 말대로 해 보자.

짧게라도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도 경험이니까 해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날 노트에 이런 말을 한 줄 썼다.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는 자산이 된다.”

(어디서 본 말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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