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6. 입학식과 졸업식
목요일에 1:1 수업 제니스 선생이 묻는다.
“내일 입학식 때 뭐 할 거야? - What are you doing tomorrow?”
“글쎄 뭐하지?” - I don't know.
“멋진 걸로 준비해.” “Prepare good performance.”
“(나도 그러고 싶다).....”
학원에서는 매주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 로비에서 졸업식 및 입학식을 한다.
일주일 중에 가장 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영어로 간단한 자기소개와 노래나 춤 같은 짧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졸업생들은 약 10~20분 정도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거나 연설을 한다.
강제성이 없으니 사람 앞에 서는 게 싫은 사람들은 졸업식이나 입학식에 참여하지 않기도 한다.
입학식 때 보면 영어를 꽤 하는 신입생들도 어색하고 부끄러워서인지 몇 마디 않고 넘어갈 때가 많다.
그런 학생들을 볼 때면 내가 영어 실력이 저 정도면 멋진 연설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는 인터넷 번역기와 제니스 선생의 도움을 받아 짧은 영어 문장 낭독으로 내 순서를 마쳤다.
매주 금요일의 메인 행사는 역시 졸업식이다.
졸업생들은 학원에서의 생활과 필리핀에서의 경험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영어로 연설을
하거나 준비한 화면을 띄우며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다. 내 눈에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학생들은 다 멋져 보였다.
평소에 학생들은 학원에서 거의 잠옷 같은 반바지와 슬리퍼를 신고 생활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후줄근한 면티에 슬리퍼를 끌고 수업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선생들은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수업에 임하는데 학생들은 금방 잠에서 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학생들 중에는 거의 속옷 수준으로 옷을 입고 학원 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더운 나라이고 교실과 기숙사가 붙어 있다 보니 집안에서 처럼 편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여자 형제가 없이 자란 내게 그런 장면들은 무척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중에도 내게 특히 신기하게 보였던 것은 졸업식 때 학생들이 추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정장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선생과 옆에서 목 늘어난 면티에 슬리퍼를 신고 졸업 사진을 찍는 한국 학생들이 내 눈에는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티셔츠가 비싼 고가의 명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장면을 볼 때면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화 차이인지 세대 차이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많이 불편했다.
"내가 이상한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장면은 자주 봐도 적응이 잘 안 됐다.
한 학생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형님 어차피 알아주지도 않는 사설 학원 졸업장이에요.
요즘 한국에서는 필리핀에서 어학연수했다고 하면 더 안 쳐줘요.
남자들은 ‘필리핀’, 여자들은 ‘호주’ 어학연수했던 건 일부러 숨긴다니까요.
그냥 미국 갔다 왔다고 뻥치는 애들도 많아요."
"이런 졸업식 해서 뭐하게요? 장난처럼 하는 졸업식 그게 뭐가 중요해요?
그 시간에 나가서 술이나 마시는 게 나아요. 졸업식 때 프레젠테이션 멋지게 하면 뭐해요.
토익 점수 안 나오면 끝인데...”
이번 졸업식에 한 여학생이 검은색 정장에 구두를 신고 졸업식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 여학생은 준비한 인사말과 프레젠테이션을 원고도 없이 진행했다. 그녀가 얼마나 유창하게 영어를
잘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는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함이 있었다.
졸업장 수여식 때 선생들이 유독 많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고 본인도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는 그 여학생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는 왜 여기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나는 토익점수 같은 거 신경 안 써도 된다. 입사시험 칠 생각도 없다.
단지 영어로 듣고 말하기가 하고 싶을 뿐이다.
어릴 때 아버님은 사진관 스튜디오에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셨다.
나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내가 사진 찍기가 싫어서 뚱해 있으면 아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놈아. 이건 다 남는 거야. 잔말 말고 찍어.”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고이 간직하고 있는 그때의 스튜디오 사진들을 보면 가슴 찡함과 뿌듯함과
뭔가가 꽉 차는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또한 더 많이 찍어 놓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은 내게 "추억"이라는 이름의 사진들을 남겨 주셨다.
억지로 끌려가서 찍었던 그때의 사진들은 물질적으로 어떤 도움도 안 되지만 내 삶의 귀중한 자산이다.
지금 하고 있는 나의 이 뻘 짓 역시 내게 돈이나 명예를 주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어 공부가 하고 싶다.
나는 졸업식이 되었을 때 ‘술 마시는 것’ 보다 ‘프레젠테이션’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사진관에 가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볼 사진 몇 장을 남기는 것이다.
그 사진들은 내가 그 시간에 거기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시간이 지나서 어학원의 졸업식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가슴 벅차고 꽉 찬 느낌이 되어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노트에 질문 몇 개를 적었다.
- 질문 : 그래서 어떻게 기억에 남는 졸업식을 할 건데?
- 답 : 영어를 잘하면 된다.
- 질문 : 어떡하면 영어를 잘하는데?
- 답 : 몰라, 젠장....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