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길을 찾다..

흔히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데...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7. 길을 찾다.


방과 후나 주말에는 비어있는 교실을 공부방으로 내어 준다.

조용한 기숙사가 있음에도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책과 노트만 펼쳐져 있고 사람은 없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다들 공부를 하려고 한다.


토요일 오전에 1:4 강의실에서 알렉스가 혼자 노트북 화면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나 : “뭐 보고 있어?”

-알렉스: “동영상 강의 보고 있어요.”,

-나 : “무슨 강의인데?”

-알렉스: “그래머 인 유즈(Grammar in Use) 요.”

-나 : “그게 뭐야?”

-알렉스: “형님 너무하시네..”

-나 : “왜?”

-알렉스: “형님은 문법 공부 안 하세요?”

-나 : “회화는 문법 공부 안 해도 된다고 하던데, 문법 공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알렉스: “형님도 일단 한 번 보세요. 형님한테도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어차피 영어는 문법으로 시작하는 게 제일 쉬워요.

저는 왜 이 동영상을 이제야 보게 됐나 모르겠어요.

예전에 우리 공부할 땐 이런 거 없었잖아요.”

-나 : “나도 처음 보는데”


-알렉스: “한국에서 이거 한 번만 보고 왔어도 여기서 공부량을 한 달은 줄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너무 아는 거 없이 왔어요. 지금 이거 보니까 정말 새롭네요.

정리가 팍 돼요.”


-나 : “그래? 나 그거 봐도 돼? 교재도 없는데 괜찮으려나?”

-알렉스: “형님 교재 필요 없고요. 그냥 재미 삼아 보기나 하세요.

제가 파일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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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Grammar in use"라는 책을 처음 알았고 영어 동영상 강의라는 것도 처음 보게 됐다.

그날은 내 영어 공부의 시작점으로 기록해도 될 날이다. 알렉스가 준 동영상 파일은

“Basic Grammar in Use” ‘박상효 선생’의 강의였다.


그날 1,2,3강을 보고 났을 때의 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나는 흥분했고 뭔가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드디어 성곽의 문을 발견한 것이다.

알렉스는 1강에서 20강까지만 잘 공부하면 입이 터질 것이라며 웃으면 이야기했다.


태어난 이래로 영어 문법책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영문법이 어디 쓰이는지도 모르면서 문법책을 첫 장부터 달달 외우려고만 했다.

내게 영문법은 시험을 치기 위해 존재하는 괴물 같은 것이었다.


학교 선생들도 영어는 암기과목이라며 무조건 외우기만을 강조했었다.

방학 때마다 새 문법책을 샀지만 앞 몇 페이지만 보다가 덮은 책이 대부분이다.

“이거면 영어 끝이다”는 수많은 문법책들이 학창 시절 책상 위에 쌓여있었지만 열 페이지

이상을 본 책은 거의 없다. 도대체 그 책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나는 “Grammar in use" 동영상을 몇 번씩 돌려봤고 '박상효 선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의 덧니까지 사랑스러웠고, 오른손 왼손 양손으로 쓰는 칠판 글씨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교재는 구할 수가 없었다. 영문판 복사본을 한국 슈퍼에서 겨우 구하기는 했지만 한글이 하나도 없는

영어 복사본이 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동영상만 계속 봤다. 그 동영상 강의는 내게

마약 같았고 '박상효 선생'은 날 구원해 줄 메시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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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강의를 통해서 언어에서 동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문법이 어떻게 구어에 적용되는지,

미국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말을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약간의 영어에 대한 지식만 늘었을 뿐인데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물론 문법을 조금 알게 됐다고 영어가 귀에 들리거나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외우지 않아도

한 줄 짜리라도 정확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프랭크 선생의 조언으로 만들어 놓았던 '문장 노트'들의 문장이 어떻게 형성되어 만들어지는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인터넷의 영어 설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속 실망하고 힘들어만 했는데 잠시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대화형 문장 노트 정리를 계속하고 있었고,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문법 공부도 하고 있었으며,

수업도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었다. 영어에 관한 뭔가를 계속하고 있으니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건

분명한 것 같았다.


'Basic Grammar in Use' 동영상 강의를 다 볼 즈음, 고민 끝에 '1:4 수업'

하나를 빼고 '1:1 수업' 하나를 추가했다. 이제 하루 4시간씩 1:1 수업을 한다.


영어는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노력을 하고 시간이 지나니 길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뭔진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영어 공부 중 재밌는 게 하나도 없었다.

헌데 지금은 영어 동영상 강의 보는 재미라도 생겼다. 다행이다.


오늘 한국을 떠나기 전에 우연히 메모했던 글을 책상 앞에 붙였다.

내게 해당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꼭 필요한 글인 것 같아 적어놓은 글이었다.

"길을 찾는다"는 말과 "통찰"이라는 말은 뭔가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흔히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방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찰’이다.


‘통찰(洞察)’을 못하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지금은 방향보다 ‘통찰’ 해야 한다.


‘통찰’하고 방향을 잡으면 속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최윤식- 대담한 미래 2.. 중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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