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한국말 안 틀리고 한다고 생각하냐?"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08. 콩글리시..
수업 시간에 무단결석을 하면 1회 경고(원장 면담), 2회째는 퇴학이다.
그런데도 그룹 수업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형님! 수업 시간에 백날 떠들어 봐야 소용없어요.
선생들이 고쳐주지도 않잖아요.
차라리 혼자 공부하는 게 나아요.
수업은 1:1 수업만 하면 좋겠어요.
쓸데없이 잡담 많이 한다고 영어가 늘겠어요.”
어떤 학생이 내게 한 말이다.
알렉스에게 물어보니 이런 말을 한다.
-나 : 왜 선생들이 학생들이 틀리게 말해도 가만있을까?
-알렉스: 학생들 말 끊을까 봐 그러지.
-나 : 그래도 고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알렉스: 한참 말하고 있는데 그거 끊어서 ‘시제’가 어떻고 ‘동사’가
어떻고 하면 말이 잘도 되겠다.
-나 : 그래도 틀리게 말하면 안 되잖아.
그러다 나쁜 버릇 들면 어떻게 해?
-알렉스 : 말에 나쁜 버릇이 어딨어? 있으면 고치면 되지.
-나 : 쉽게 안 고쳐질 거 같은데.
-알렉스 : 선생들이 들을 만하니까 가만있는 거야.
학원에는 EOP(English Only Person) 시스템이라는 것이 있다.
EOP 표찰을 목에 걸고 하루 종일 영어만 쓰는 것이다.
졸업이 가까운 학생들이 주로 하는데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서로 영어로 말하는
것을 꺼리다 보니 일상에서 영어를 많이 쓰게 끔 학원에서 만든 시스템이다.
-나 : 왜? 애들이 EOP를 오래 못할까?
-알렉스: 아는 게 많아서 그래.
-나 : 그건 무슨 소리?
-알렉스: EOP 하는 애들은 영어 좀 하는 애들이잖아. 상대방 틀린
말이 자꾸 귀에 들리거든.
-나 : 상대방 말 틀린 거 들리는 게 무슨 상관이야?
-알렉스: 영어 좀 하는 애들은 내 말도 남들에게 그렇게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니 자꾸 입이 막힐 수밖에.
문법을 많이 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 쉬워..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입을 점점 닫게 되는 거야.
그게 머릿속 공책에 글을 쓰는 거 거든.
회화는 문법이 떠오르기 전에 입에서 말이 나와야 하는데 문법 공부만
자꾸 하다 보니까 말은 못 하면서 남들 틀린 말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거지.
형도 문법 공부하니까 재밌지? 좀 지나면 형도 그렇게 될 걸?
-나 : 딱!! 그 정도만 되면 좋겠다.
오늘은 수업시간에 프랭크와 나 두 명만 수업을 했다.
학생들이 모두 도망을 갔는지 아무도 수업에 안 들어왔다.
월말로 갈수록 이런 날이 잦아지는 것 같다.
프랭크가 물어본다.
-프랭크: 너 1:1 수업 두 번 한다며.
-나 : 그렇다.
-프랭크: 영어로 많이 떠드는 건 일단 좋은 일이다.
-나 : 잘 모르겠다.
-프랭크: 너는 1:8 수업 결석을 한 번도 안 하는데 내 수업이 재밌냐?
-나 : 모르겠다. 난 수업 빠지고 할 일도 없다. 그래서 그냥 온다.
-프랭크: 좋다. 그럼 오늘은 특별히 네게만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겠다.
(프랭크는 별거 아닌 걸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버릇이 있다.)
-프랭크: 어학은 기본 네 가지로 구성된다. 읽기(Reading), 듣기(Listening),
쓰기(Writing), 말하기(Speaking) 이 중에서 뭐가 가장 쉬울 거 같냐?
-나 : 글쎄, 전부 어려운데. 그래도 읽기(Reading)는 학교에서 좀 하니까 쉽지 않을까?
-프랭크: 헐~~ 리딩이 쉽다고?
한국 학생들이 영문 소설이나 타임스 사설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 : (진짜 그러네..) 그럼 뭐가 제일 쉽냐?
-프랭크: 질문을 바꾸자. 위의 네 가지 중 한국 학생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게 뭐냐?
-나 : ‘말하기(Speaking)’ 아닐까?
-프랭크: 맞다 한국 학생들 스피킹을 하고 싶어 한다.
토익이 900이니 800이니 하는데도 말을 잘 못 한다.
-나 : 그야 한국에서 스피킹 할 일이 많이 없으니까 그렇지.
-프랭크: 맞다.
-프랭크: 다시 물어보자. 읽기(Reading), 듣기(Listening), 쓰기(Writing),
말하기(Speaking) 중에서 뭐가 가장 익히기가 쉬울 거 같냐?
-나 : 몰라. 리딩 아니라며.
-프랭크: 당연 ‘스피킹’이다.
-나 : 으잉? 왜 그렇게 생각하냐?
-프랭크: 미국 어린애들이 시나 소설, 신문 사설 같은 걸 읽을 수 있을 거 같냐?
-나 : 아니.
-프랭크: 미국 어린애들이 CNN 뉴스 알아들을 수 있을 거 같냐?
-나 : 몰라. (소리야 들리지 않을까?)
-프랭크: 그런데 걔들이 토익 900점 맞는 한국 학생들보다 스피킹 잘하지?
-나 :........
-프랭크: 왜 그럴까?
-나 : (자기 나라 말이니까 그렇지)
-프랭크: 스피킹이 쉽기 때문이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은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말이 더 쉽다는 뜻이다. 한국 학생들의 영어 능력은
기본적으로 상당한데 말하기는 미국 애들보다도 못하다. 왜 그럴까?
-나 : 안 해봐서 그렇지.
-프랭크: 맞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한국 학생들은 부끄럼이 너무 많다.
그래서 말을 잘 안 한다. 말할 때 끊으면 다시 안 한다. 안 하는데 늘겠나?
-나 :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프랭크: 그러니까 단어니 문법이니 따지지 말고 일단 많이 떠들란 말이다.
단어 생각 안 나면 한국말 섞어서 콩글리시라도 일단 떠들면
말은 되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 애들도 5살만 되면 말 다 한다.
니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영어 공부한다며?
-나 : 한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얻어맞으면서 한다.)
-프랭크: 6~7년 했으니까 5살짜리 정도는 되잖아.
그러니까 그냥 떠들기라도 해라. 그러다 보면 된다.
-나 : 한국 학생들은 틀리게 말하는 거 싫어한다.
-프랭크: 말 좀 틀리는 게 뭐 대수냐 자국어도 틀리게 말할 때 많다.
-나 : 처음부터 똑바로 배워야지.
-프랭크: 너는 한국말 안 틀리고 한다고 생각하냐?
네가 하는 한국말이 완벽하게 문법에 맞다고 자신하냐?
-나 : 나는 완벽한 한국어 문법으로 말한다.
-프랭크 : 녹음해서 들어봐라.
-나 :..... (진짜 내가 한국말을 문법에 완벽히 맞춰서 하는 걸까?)
(어!! 밀리기 싫은데 갑자기 밀린다는 생각이 든다)
-프랭크: 어느 나라나 애들은 말은 다 틀리게 한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콩글리시는 어린애 말이라고 생각해라. 부끄러운 거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렇게 배우는 거다.
-나 : 콩글리시라도 뭐가 생각나야 떠들지.
-프랭크: 야! 너 지금 영어로 나하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냐?
-나 :........
-프랭크: 문법, 단어 몰라도 말 잘하는 구만.....
-나 :...........
-프랭크: ㅋㅋㅋㅋㅋㅋ
그날 나는 2시간 동안 프랭크와 통역 없이 둘이서 이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끝날 때쯤 나는 약간 흥분해 있었고 희망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변하고 있다는 직감 같은 것이 왔던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