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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랑끝 May 09. 2021

살다 보면 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긴다.

'일당백' 정미녀를 그리며...

[살다 보면 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긴다.]


얼마 전 아끼던 유튜브 채널인 “일당백”의 진행자가 교체됐다.

'일당백'은 정영진, 정박, 정미녀(?) 이렇게 세 명이 진행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이다.

진행자 중 '정미녀'라는 매우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전에 가끔 '매불쇼'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하던 여성 패널이다.


'정미녀'라는 이름이야 재밌으라고 지은 거 겠지만 화면에 보이는 그녀는 꽤 

미인이다. 미(美)의 기준이야 개인적인 것이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지만 전직이 기상 캐스터이니 어쨌든 방송국의 검증을 통과한 사람인 

건 확실하다.


살면서 섹시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영화나 방송은 물론이고 실제로 만난 사람 중에도 '섹시하다'라고 느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나는 섹시함을 느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당백'의 콘텐츠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녀가 점점 매력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녀의 첫 캐릭터였던 '백치미'는 묘한 섹시함을 자극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식(?)해져 가는 그녀의 뇌는 더욱 섹시함을 증폭시켰다. 

가정을 이룬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속되게 표현하지만 속되지 않게 들리는 

그녀의 언변이 섹시함에 깊이를 더 했다. 


‘팟캐스트’로 시작한 이 콘텐츠는 시즌이 3까지 이어가며 거의 200권의 책을 다뤘다.

그중 일부만 읽었다고 해도 그녀의 독서량은 무시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

(‘일당백’은 ‘일생동안 읽어야 할 백 권의 책’의 줄임말이다)


인간에게 풍기는 느낌은 본인의 의도에 상관없이 나타난다.

특히, 지성미라는 것은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된장녀(?)' 콘셉트로 시작한 이 여인이 문학작품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철학자들의 말에 의문을 던지며 인문학적 지식으로 뇌를 무장했다.


책 몇 권을 읽는다고 지성이 눈에 띄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이 건강한 사람은 작은 거름에도 뿌리를 잘 뻗게 마련이다.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한 그녀가 갑자기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팬들과 가족같이 지내던 그녀가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갑자기 

방송에서 사라진 것이다. 아쉬웠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느낌이랄까. 


보통 이런 일은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일어난다. 

그녀가 떠난 후 빈자리가 주는 이질감 때문인지 몇 년간 빠지지 않고 듣던 

'일당백' 프로그램을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콘텐츠는 계속 생산됐지만 알고리즘에 뜨면 보지는 않고 '좋아요'만 누르고 

바로 빠져나오는 것이 버릇이 됐다. 정미녀가 없는 일당백은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라 봐지지가 않는다. 


“과학과 사람들”과 더불어 몇 안 되는 아끼는 유튜브 콘텐츠였는데 이렇게 

멀어져서 안타깝다. 하지만 워낙 좋은 프로그램이니 정비가 끝나 원활히 

돌아가면 그땐 다시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거리를 두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듯하다. 


희한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참으로 마음이 허하다.

사람의 난 자리가 크다는 걸 오랜만에 느낀다.




살다 보면, 뭔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들이 생긴다.

설명하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 면전에

"왜, 말 못 하냐?"라고 하는 것만큼 잔인한 짓은 없다.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은 다시 돌아올 문을 열어두기 위해서이거나,

어떤 일에 대해서 누군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정도로 불러도 대답이 없다면 뭔가 분명히 큰 이유가 있을 터인데,

계속 불러대면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플 것이고 본인은 무척 괴로울 것이다.


좋은 기억은 묻어 둘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살아보니 그렇지 않던가?

때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설명하지 말아야 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삶이 두꺼워진다.

그런 걸 '배려'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면서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 떠나지 말라고 악다구니 쓰면 안 된다. 

서로에게 괴로움만 남는다.


그리움은 추억을 만든다.

그리움이 많은 사람은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사람이다.


여기까지만 하고 기다림의 시간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섹시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헤어져서 참 아쉽다.


어디서든 건강하길....

또 볼 수 있길.....


'정미녀' 힘내시라!!


(유튜브 콘텐츠 “일당백” 영상에 단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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