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내 삶이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 적 있는가. 주변에서 반대하는, 차별하는 성향을 갖고 있을 때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것은 어떤 성향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해서 아닐까.
실제로 '잘못된 삶 wrongful life'이라는 소송이 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장애를 진단해내지 못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 소송이다. 저자 김원영 변호사는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장애인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반대하며, 그들의 삶이 어려움이 따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불행하거나 가치 없는 건 아니라고 믿는가? 장애아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비장애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축복과 기대,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시간으로 기억할 자신이 있는가? (...) 내 장애를 고칠 수 있고 나와 같은 장애아를 출산하지 않을 수 있는 경우에도 거리낌 없이 그 시술을 거부할 자신이 있는가? p.99
저자가 던지는 질문에 당당하게 자신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다만 상대가 힘들겠다거나 불행하겠다고 섣불리 지레짐작하고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은 서사의 편집권에 대한 인정(p.149)이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상호작용을 하며 자아를 형성한다. 예의 바른 무관심, 섬세한 도움의 말을 주고받으며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다. 모두에게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p.15)하다.
나는 그동안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가 무한히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살았다. (...)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 그러한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 강인한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좋다.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서야만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p.308-310
모두가 완전하기 어렵고 취약하다는 걸 인정하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내 삶이 꼭 잘못된 건 아니지 않을까. 글 쓰는 독서모임에서 자신에 대한 'ㅇㅇ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써보았다. 서로 다른 결핍을 가진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답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책 마지막 문장처럼 누구도 우리를 실격 시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