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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un 23. 2023

오발탄이 아니라 직격탄

‘오발탄’, ‘수난이대’ 등을 포함한 숱한 근현대 소설들을 초등학교 5학년도 되기 전에 뗐다. 공부하고 싶다는 아이를 학원 보내줄 돈이 없는 빈곤한 형편이었으나, 우리 식구가 가진 책을 두는 창고로 공동 지하실 전체를 세 들어야 할 만큼 우리 집에는 서적이 넘쳤다. 이는 큰할아버지가 출판업계의 큰손으로서 우리에게 수많은 책을 전적으로 지원해 줬기 때문이었다.


큰할아버지는 남녀 구분 없이 무조건 맏이가 출세해야 집안이 장성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탄생을 전해 듣자마자 에어컨 크기의 상자에 유아용 서적을 가득 담아 보내줬다. 장손이라지만 아빠 없이 태어난 나였다. 지금이야 ‘미혼모’를 ‘비혼모’라고 부르자, ‘편부모 가정’을 ‘한부모 가정’이라고 부르자는 사회적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이고 그런 풍조가 많이 정착되었지만 내가 태어난 당시에는 편견 어린 시선이 매서웠다. 그랬던 과거에 나이까지 지긋한 분이 도대체 어떤 마음과 각오로 책을 보내줬을까, 지금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큰할아버지의 지원이 무색하지 않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컸다. 거실에 TV를 켜놓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도 뛰놀기보단 유치원에 비치된 얼마 안 되는 서적을 읽고 또 읽기를 즐겼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교과서를 받은 날엔 잠들기 직전까지 교과서에 실린 글을 읽었다. 방학이 되면 독후감을 잔뜩 써서 제출했고 내 독후감은 항상 우수상을 받았다. 그런 내 소식을 접한 건지, 내가 고학년이 되기도 전에 근현대 소설집 58권 세트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어른들은 내가 읽기엔 아직 어려운 책이라고 타일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는 더더욱, 나를 과소평가하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들으면 특히나 호승심이 불타오르는 아이였다. 상자째로 베란다 행이 되어버린 그 책들을 나는 매일 같이 몰래 꺼내어 읽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나는 난생처음 교내 백일장이라는 행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주제가 주어졌고 제한 시간은 고작 50분. 종이가 부족하면 더 달라고 요청하라는 안내와 함께, 사각형 칸이 앞뒤로 빼곡한 원고지를 세 장 받았다. 일기가 아닌 나만의 글을 쓰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는 전부 가족들에게 검열받던 내가,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나의 이야기를 나의 목소리로 쓰는 건 그 순간이 최초였다. 가족에 대해 수필을 썼는데 내용이 꽤 우중충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으나 내가 어렸을 때는 나를 향한 정신적 학대가 더욱 뚜렷했던 집안이었으니.


사람들은 남에게 하소연하기를 마냥 싫어하진 않지만, 나만큼 아픔을 겪고 자라는 아이는 대체로 없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는 내가 받은 아픔을 혼자 꼭꼭 숨겨 삼키곤 했다. 그렇기에 그 짧은 50분 동안 나는 내가 생각하고 겪고 느낀 모든 아픔을 표출하고 싶은 깊은 갈망과 소원을 가진 한 명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 꼬마 예술가는 종이를 세 장이나 더 받아와 긴 분량의 글을 써서 제출했고, 끝내 교내 신문에 글이 실리기까지 했다.


나는 내 글을 읽고 많은 교사가 내게 위로의 눈빛과 따뜻한 동정을 건넨 걸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내가 그때까지 존재론적으로 큰 죄를 짓고 살아온 것도 아니었으며, 우리 가족이 누가 보아도 썩 훌륭한 가정을 이룬 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혼자서 끌어안고 있던 세계가 비로소 남의 시선으로 인해 확장되는 경험. 또한 내가 아닌 타인의 세계를 내 안으로 들이고 싶은 욕구. 나는 그제야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이 무조건 나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고 그것이 나를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나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쓴다. 다만 어렸을 때는 정확한 목표지점이 없는 글을 썼기에 나의 글은 종종 오발탄이나 불발탄이 되곤 했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는 글. 소리만 내지를 뿐인 글.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목소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누군가의 삶에 문장을 남기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는 오늘도 ‘직격탄’을 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누군가의 세계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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