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가 만난 장수아저씨, 장수아줌마
글. 송승현
여름방학이 되었어요. 하지만 보리는 크게 기쁘지 않았어요. 방학이 되면 캠핑도 가고 워터파크도 가고 신나게 놀고 싶었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캠핑이나 워터파크 대신에 시골 외할머니댁에 가야 해요. 고집불통인 데다 보리만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 달래랑 놀아주는 건 보리의 몫이 될 게 뻔해요. 스스로 도시 남자라 자부하는 보리는 시골에서 재미있을 자신이 없었어요.
“한 달 동안 할머니 댁에 있을 거야. 휴, 할머니 마을에 놀이터는 없지만, 오히려 마을 전체가 놀이터일걸? 휴, 그러니까 장난감 너무 많이 챙기지는 말자. 휴, 대신 책을 좀 더 넣어 봐.”
엄마는 말을 조금만 해도 숨이 가빠서 여러 번 쉬어야 했어요.
“흥! 진작 게임기라도 샀다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 집은 너무 심심해요.”
“할머니 집은 심심해, 심심해!”
보리가 투덜대자, 달래도 따라서 투덜댔어요.
자동차 트렁크에 보리와 달래의 살림살이들이 가득 실렸어요.
‘이렇게 캠핑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워터파크가 있는 리조트로 가는 거였다면….’
차가 덜컹 일 때면, 보리 마음도 덩달아 덜컹거렸답니다. 휴게소를 두 번 들르고도 한참을 달려서야, 보리네 차는 할머니 마을 어귀에 다다랐어요. 한참 자다 깬 보리와 달래는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무섭게 생긴 장승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언제 봐도 무서운 저 기둥은 왜 저기 서 있는지, 보리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아무튼 드디어 할머니 댁에 도착했어요.
“아이구, 내 강아지들. 오느라고 힘들었지?”
할머니가 보리와 달래를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할머니, 보고 싶었어! 봉구야, 누나 왔다!”
달래는 할머니도 보고 봉구도 보니 그저 신이 났어요. 꼬리를 살랑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봉구를 보니, 보리는 더 심통이 났어요. 말 못 하는 강아지와 고집불통 달래와의 한 달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거든요.
“엄마 무릎도 아픈데, 애들 맡겨 죄송해요. 달래 절대 업어주지 말아요. 둘이 잘 놀긴 할 거예요. 잘 부탁해요.”
“원, 별걱정을 다 한다. 여기 걱정은 말고 너는 아기 잘 낳고 몸 몸조리 잘해야 한다.”
“응, 엄마. 고마워요.”
“장모님, 감사합니다.”
할머니 댁에서 하룻밤 머무른 후, 보리 엄마와 아빠는 서울로 돌아갔답니다.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랑만 있는 건 보리도 달래도 처음이었어요. 엄마 없이 자보는 건 더더욱 처음이었지요.
“할머니, 잠이 안 와. 옛날이야기 해줘.”
낯선 잠자리에 뒤척이던 달래가 할머니에게 졸랐어요.
“흠, 옛날이야기라…. 아, 그래. 그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너희들 어제 할미 집에 올 때, 마을회관 근처에 있던 장승 봤지?”
“아, 그 무섭게 생긴 거요?”
“무서웠어.”
“그래, 그거. 장승 이야기를 해줄게. 잘 들어봐.”
“아주 오랜 옛날, 어느 평화로운 나라에 나라를 지키는 장수인 신랑과 각시 부부가 살았어. 마을 사람들은 이 부부를 장수 부부라고 불렀지. 장수 부부는 마음씨도 착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단다. 장수 부부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어. 부부는 아들을 무척 사랑했고, 금이야 옥이야 기르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대.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에, 평화롭던 나라에 큰일이 생겼어. 외적의 침입으로 큰 전쟁이 일어났고,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 나라를 위해 싸워야 했다는구나. 용감한 장수 신랑은 각시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꼭 돌아오마 약속하며 전쟁터로 떠났단다.
그런데 장수 신랑이 전쟁터에 간 사이 아빠가 보고 싶었던 아들은 엄마가 모르는 사이에 아빠를 찾아 마을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어. 장수 각시는 아이를 찾아 헤맸지만, 다시 볼 수는 없었어.
장수 신랑은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왔어.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가 없는 거야. 부부는 비통해하며 오랫동안 아들을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단다. 매일 슬퍼하며 마을 어귀에 서서 아들을 기다렸는데, 그 모습을 본 하늘님도 같이 슬퍼했대. 그래서 장수 부부가 어느 마을에서든 멀리에서 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도록 모든 마을 입구에 서 있게 해 줬대.
시간이 흘러 장수 부부는 ‘장승’이라 불리게 되었어. 이 장승은 아직도 마을 입구를 지키며 아들을 기다린대.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을 지켜주기도 한다는구나.”
“아들을 결국 만나지 못했다니, 너무 불쌍해요. 아이도 엄마 많이 보고 싶었겠다.”
“힝. 나도 엄마 보고 싶어.”
“열 밤씩 세 번 지나면 엄마가 아가 동생 데리고 오실 거야. 그러니 얼른 코 자자. 밤에 안 자면 귀신이 놀자고 따라온다!”
“엄마야!”
귀신 이야기에 무서워진 보리와 달래는 눈을 꼭 감았어요.
“어? 여기가 어디지? 나 왜 여기 있어?”
갑자기 눈을 뜬 보리가 정신을 차려보니, 달래와 함께 어느 산속이었어요.
“오빠, 엄마 보러 간다고 했잖아. 근데 여긴 어디야?”
“왈! 왈!”
봉구까지 데리고 어디를 가고 있는 건지, 보리는 어리둥절했어요.
“나도 모르겠어. 오빠 손 꼭 잡아. 이쪽으로 가보자.”
“나 너무 무서워.”
“크르릉….”
봉구가 경계하며 ‘크르릉’ 하자, 하얗고 까맣고 기다란 것들이 이리로 휙, 저리로 쉭, 하늘로 슉, 땅으로 훽 날아다니는 게 아니겠어요?
“엄마야!!!”
보리와 달래는 놀라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어요.
“어 엄마아느은 어어디이써어?”
“어어디서어.. 와아써어어..?”
“나라아앙.. 노올자아아아아..”
“아니야아아.. 나라앙 노올자아아아...”
하얗고 까맣고 기다란 것들이 아이들에게 다가오며 이상한 소리를 내었어요.
“앗!!! 귀신이다!!! 저리 가!!! 무서워!!! 엄마!!! 살려줘!!!”
아이들 보고 따라오라는 듯 봉구가 앞장섰어요. 보리는 달래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어요. 귀신들은 아이들을 계속 쫓아왔어요.
봉구를 따라 한참을 달려 숲을 벗어나니, 어느새 마을회관 앞이었어요. 그곳에는 무서운 모습으로 눈을 부라리는 장승이 서 있었지요. 보리와 달래는 할머니께 들은 장승 부부 이야기가 생각나, 장승 부부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살려주세요! 귀신이 쫓아와요!”
“이놈들아! 아이들은 괴롭히지 마라! 모두 그만!”
장승 아저씨의 호통에 귀신들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어요. 다리에 힘이 풀린 보리와 달래, 그리고 봉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어요.
“저런. 많이 놀랐나 보네. 얘들아, 괜찮니?”
장승 아주머니의 다정한 말에 아이들은 마음 놓고 울음을 터트렸어요.
“흑흑…. 그러니까, 귀신들이 휙휙, 쉭쉭, 슉슉, 훽훽. 너무 무서웠어요. 으앙!”
장승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토닥이며 달래주었고, 장승 아저씨는 다시 귀신들을 혼냈어요.
“너희들! 그러니까 그렇게 한꺼번에 나타나고 휙휙 지나가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
“죄송해요. 너무 심심해서 그랬어요.”
“억울해요! 우린 그냥 얘네들이랑 놀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에요.”
“꼬마들아, 미안해. 놀라게 한 것 사과할게.”
귀신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변명도 하고 사과도 하느라 바빴어요.
“이 녀석들이 말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게 하기는 해도, 나쁜 애들은 아니란다.”
장승 아주머니는 아이들을 안고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말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희들끼리 어디 가고 있었던 거니?”
“그게, 달래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해서….”
“엄마 보고 싶어! 으앙!”
달래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고, 보리도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어요.
“엄마가 며칠 후에 막냇동생을 낳아요. 그래서 우리가 할머니랑 같이 있어야 하거든요. 엄마는 한 달 뒤에 오실 건데, 달래가 못 기다리고 계속 엄마 보고 싶다고 그래요. 사실 저도 벌써 엄마가 보고 싶어요.”
“저런, 그랬구나. 하지만 너희들끼리 엄마를 찾으러 가는 건 너무 위험하단다.”
“우리도 그렇게 아들을 잃었어. 엄마는 기다리면 오실 거야. 그러니까 할머니 집에서 안전하게 기다려야 해.”
장승 부부의 말에 보리와 달래는 눈물이 고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럼, 이제 우리랑 놀자! 놀아도 되는 거죠?”
“놀자, 놀자! 뭐 하고 놀까?”
“야호! 나 잡아 봐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아니야! ‘놀이’하면 ‘얼음땡’이지!”
숨죽인 채 이야기를 듣던 귀신들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빨리 놀자고 야단이었지요. 그런 귀신들 모습을 본 보리와 달래는 웃음을 터트렸어요. 귀신이 무섭다는 생각도 사라졌어요.
“그럼, 오늘 밤은 여기서 놀고, 아침이 오기 전에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자!”
“네! 좋아요!!!”
한밤중의 마을회관 앞 공터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재밌는 놀이터가 되었어요. 보리와 달래, 그리고 봉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일 때까지 깔깔거리며 놀았답니다.
다음 날 보리와 달래, 봉구는 늦잠을 잤어요. 잠에서 깬 보리는 할머니를 꼭 껴안고 말했어요.
“할머니, 할머니 집은 정말 재밌고 신나는 곳이에요! 저, 엄마를 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나도, 엄마 기다릴 수 있어!”
“허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래그래, 할미랑 재미나게 지내보자!”
보리와 달래는 할머니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놀았어요. 텃밭에선 메뚜기며 여치, 사마귀를 잡고 놀았어요. 김밥 싸서 산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고, 개울에서는 거의 매일 물놀이를 했어요. 비 오는 날은 달팽이 하고도 놀고, 비 그친 다음에는 지렁이를 풀밭으로 옮겨주는 것도 놀이었어요. 할머니 마실 가실 때 따라가면 거기엔 또 다른 놀이터가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보리와 달래가 가장 좋아한 놀이터는 마을회관 앞마당이었답니다. 장승 아저씨와 장승 아줌마가 다정한 눈길로 아이들을 지켜주는 곳이었으니까요.
할머니와 보리, 달래, 그리고 봉구가 재미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 달이 후딱 지났어요. 그 사이, 엄마는 건강하게 아기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쳤답니다. 엄마와 아빠가 아기 동생을 안고 보리와 달래를 데리러 오셨어요.
“울 애기들,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엄마 기다려줘서 고마워.”
“신통한 녀석들, 저희 둘이 얼마나 잘 노는지, 내가 힘든 게 하나도 없었다니까.”
“엄마, 고마워요.”
“장모님, 고맙습니다.”
“할머니, 정말 재밌었어요. 또 놀러 올게요!”
“또 놀러 올게! 봉구야, 누나 보고 싶어도 꾹 참아!”
보리와 달래는 집으로 돌아가요. 아빠 차를 타고 마을회관 앞을 지나는데, 장승 부부가 보였어요. 아이들은 장승 아저씨, 아줌마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보리가 잠깐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했어요. 보리와 달래는 장승 부부에게 뛰어가 꼭 안았어요.
“고마워요, 장승 아저씨, 아줌마.”
장승 부부가 따뜻한 눈으로 보리와 달래를 바라보았어요. 아이들을 지켜보던 엄마도 아기를 안고 차에서 내려 장승 부부에게 다가왔어요. 장승 부부는 엄마와 아기를 뚫어지게 바라봤어요. 엄마는 장승을 어루만지며 속삭였어요.
“제 아이들에게도 수호신이 되어주셨던 거예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 울며불며 찾으러 다니던 절 지켜주셨었죠. 사실 전 꿈인 줄 알았어요. 이제 알겠네요. 장승 아저씨 아줌마가 진짜로 지켜주셨었다는 걸. 참 감사했어요. 보리와 달래도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보리네 가족이 떠났어요. 장승 부부는 자동차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았어요. 장승 부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아기 봤어요? 한눈에 알아봤어요.”
“드디어 만났네요. 천년을 찾아 헤맨 우리 아들.”
“좋은 가족들이라 안심이에요. 건강히 천수를 누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