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전에 오로지 ‘나’로 일하던 시기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작은 종이 한 장이면 되던 날들이 있었다. 작은 종이에는 내 이름, 직책, 회사, 이메일,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굳이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늘 명함을 주고받은 뒤, 다른 사람과 마주 앉아 가운데에 책을 놓고 이야기했다. 회사에서 새로 나온 책을 설명하는 날들도 있었고, 이제 기획단계인 책을 논의하는 날들도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상대는 매일매일 바뀌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내 일이었다.
책을 좋아하던 아이는 그대로 커서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전공을 살려 해외문학을 다루는 회사 두 곳에서 10년을 일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파는 책을 읽었고, 집에서는 남이 파는 책을 읽었다. 인스타그램에는 일하는 내 사진, 책 읽는 내 사진, 내가 읽는 책 사진, 내가 파는 책 사진뿐이었다. 그때의 나는 ‘일하는 나’가 곧 ‘나 자신’이라고 믿었다. 회사에서의 나날들이 나의 시간이었고, 내가 파는 책의 메시지가 곧 나의 메시지라고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고단한 나날들도 있었다. 갑자기 책 말고 다른 상품을 팔아야 하는 날들도 있었고, 팀장이 없는 상황에서 팀장 대행을 맡아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회사의 지시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날들도 많았다. 내 의사에 반해서 거래처에 석고대죄를 해야 하는 날에는 팀장님이랑 땡땡이를 치기도 했다. 셀럽맷님이 그랬던가, 눈물을 닦으면 다 에피소드라고. 동료들과 한바탕 떠들고 나면 그 일들은 모두 에피소드가 되었고 금세 회복되었다.
매년 6월, 국제도서전을 앞둔 출판계는 어수선하다. 21년 국제도서전 시즌에는 우리 회사가 그중 제일 어수선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멈춰버린 코로나19에 무섭게 적응해 버린 시기, 서울 국제 도서전이 성수동에서 작은 규모로 열리게 되었고, 기존과는 다른 장소와 방식에 우리 모두는 당황했다. (매년 6월에 열리던 국제도서전이 21년에는 9월에 열렸다) 설상가상 회사에서도 의견이 일치가 되지 않았고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면서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회사의 일이 나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이 상황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소리 높여 의견을 말하다 보니 어느새 내 어깨 위에 메어진 도서전 총대... 모든 것이 아삽하게 이루어졌다.(아삽..이라는 판교어를 쓸 줄이야... 하지만 정말 아삽이었다) 급하게 컨셉을 잡고 부랴부랴 부스 디자인을 하고 후루룩 홍보물을 만들고 허겁지겁 판매할 책 리스트를 작성했다. 퇴근 없이 일하던 며칠이 지났고 목이 쉬도록 떠들었고 목장갑을 끼고 땀을 흘리며 그렇게 도서전이 시작되었다.
우리 부스가 가장 눈에 띄었다. 우리 앞에는 부스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줄까지 섰고, 후배님이 책 제목만 이야기해도 바로 구매로 이어졌다. 단말기에서는 영수증이 계속 줄줄이 나오고 있었고 ‘안녕하세요~ 열린책들입니다~’를 하도 외치는 바람에 먼지를 너무 많이 먹었다. 물류 상무님이랑 가장 많은 통화를 했던 날이었고, 성수에서 파주로, 책 몇 백 권을 싣고 다시 성수로, 하루에도 두 번씩 왔다갔다 했다. 판매가 중지되었던 책들을 갖고 나가 완판했고, 매대에 책을 올리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정신없이 며칠이 지났고 이번 도서전에서 가장 돋보였다, 는 평을 스스로 해보며 내가 총대를 메었던 첫 도서전이 마무리되었다.
이 경험을 먹고 몇 년을 살 수 있을까. 이 장면을 회상하는 지금이 2025년이니까 앞으로 족히 5년은 더 먹고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편집팀, 디자인팀 비롯한 경영관리팀, 물류팀, 모두가 나와 우리 팀 의견을 따라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일 말고도 모두가 으쌰으쌰 하면서 일하던 기억이 너무 많은 10년이었다. 신세계 강남점 팝업, 홍대 와우북, 매년 특별판을 제작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 틈틈이 대형 매출을 내던 리뉴얼북, 200주년 기념 도스토옙스키 등등.
이 기억들이 앞으로의 10년 동안 나를 먹고살게 할 수 있을까.
일은 어렵긴 해도 힘들진 않았다.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나의 임무였고 나는 프로직장인(?)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거의 해답을 찾아내는 편이었다. 해답을 찾기 힘들면 편법을 써서라도 해답을 만들어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회사도 지지해 주었고 나 또한 만족하는 편이었다. 늘 나서기 좋아했던 나는 더 큰 일을 하고 싶기도 했다. 파주에서 열리는 전국노래자랑에 후배랑 신간을 들고나갈까, 했던 나에게 더 큰일이 벌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어떤 거대한 멈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