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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Mar 26. 2021

문학이 쿨해지는 방식 - 김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OE 수첩 - 김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김솔의 작품은 <암스테르담 가라지세일 두 번째>와 <유럽식 독서법>으로 만난 적 있었다. 내가 대학원을 처음 들어갔을 때 소설 수업에서 발표를 맡았던 작품이 <유럽식 독서법>이었고 이야기는 아주 난해했다. 대학원 입학하고 처음 발표를 맡았던 차였기에 선배들도 꽤 어렵지 않겠느냐고 한 마디씩 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완서, 황석영 같이 착실하고 정통적인 문장에 익숙했던 내게 김솔은 신세계였다. 형광펜을 들고 연거푸 밑줄과 동그라미 치면서 읽고 발제문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김솔은 진지하지 않다. 그가 진지해지면 그것은 장난이다. 진지함을 가장한 위트이다. 그의 문장은 주로 조금 긴 편인데, 그 긴 문장의 구와 구, 그것들을 구성하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만의 세련된 유머가 가득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유머가 한국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가 지금 여기 서울, 내가 문학을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것이라는 사실이 이상한 - 동질감 혹은 쾌감에 가까운 – 감정을 자아냈다고 나는 고백한다. 사실 그의 문장력은 조금 소름 끼치는 수준이다.


원형 경기장 안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90분 동안 치열하게 싸워서 결정한 승패가 어느 누구의 생사도 결정하지 않는 축구 경기를 추악한 전쟁과 비교하는 건, 전쟁에서 죽거나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모독이라며 그는 울먹였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산 자나 죽은 자 사이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진실은 마치 뜨거운 물과 같아서 그게 차갑게 식을 때까지 손바닥 안에 가둬둘 자신이 없다면 굳이 인과의 퍼즐을 완성할 필요는 없었다.



문장은 소설 속 주인공뿐만이 아닌 독자의 삶의 한가운데를 향해 비수를 꽂는다. 그의 문장은 때때로 시가 된다.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서 마치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자본에 의한 불평등으로 점철된 사회를 향한 조롱과 진지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진지하지 않은 문학적 해학으로 이리저리 넘나들면서 가장 현대적인 풍자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천국의 주방은 프랑스 출신의 요리사가 책임지고 있는 반면 지옥의 시민들은 영국 출신 주방장에게 복종해야 한다. 천국의 도로는 벨기에 경찰이 눈과 귀를 막은 채 지키고 있고 지옥의 도로는 독일 경찰이 최첨단 장치까지 동원하여 감시한다. 천국의 계단은 스위스 제품이지만 지옥의 문은 메이드 인 이탈리아일 확률이 높다. 만약 이런 농담을 듣고 불같이 화를 내는 영국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 출신일 것이라고, 바이 부레는 여섯 번째 닭날개 튀김을 삼키면서 귀띔했다.


시에라리온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자 바이 부레를 착취하는 장 크리스토프 드니와 루 첸에게는 늘 ‘돈’이 필요하다.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야 장 크리스토프 드니는 ‘중견 증권사’에, 루 첸은 ‘가정용 전동공구를 만드는 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 물론 급여가 턱 없이 모자란 탓이겠지만 - 그들은 부업을 해야만 하고 런던의 외곽으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 한편 이민자 바이 부레에게는 전쟁으로 인한 아픈 ‘기억과 상처’ 뿐이다. 작품 후반부에서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각종 기업에 제품 관련 소비자 소송을 제기하여 큰돈을 벌어들인다. 그의 상황이 나아지는 듯하지만, 기업들로부터 다시 패소하여 파산하면서 이야기는 (김솔 식으로) 막을 내린다.


상실감에 가득한 바이 부레가 정착하려는 런던 사회에는 그를 다시 착취하고 핍박하려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인종 차별이 만연해있다. 이 작품의 전반에는 이민자들의 끔찍한 생활이 드러난다. 바이 부레, 루 첸, 장 크리스토프 드니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돈’이다. 당장 눈앞의 생계 앞에 비참해지는 이들에게서 윤리 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신형 스포츠카를 타고 도버 터널을 통과하여 런던에 도착한 그의 몸 곳곳은 고급 브랜드의 로고들과 금 장신구들로 반짝였으며 뇌쇄적인 백인 여자를 왼쪽 어깨에 매달고 있었다. 바이 부레는 루 첸과 장 크리스토프 드니 앞에서 그 여자에게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지폐 몇 장을 허공에 내던지며 쫓아버렸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 온 돈 봉투를 옛 주인들에게 하나씩 건네면서 내일 저녁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한 뒤 스포츠카와 함께 사라졌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제3세계와 선진국으로 몰리는 각국의 이민자들의 실제 어려움을 ‘소설’이라는 채널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붙여서 더욱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비꼬고 있다. 해학적이고 풍자적 설정을 통해서 이 소설은 문학이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 얼마나 ‘쿨’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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