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구 Apr 20. 2021

여성의 숨은 얼굴 - 권여선 <희박한 마음>

OE 수첩 - 권여선 <희박한 마음>



너는 가족과 나와 함께 이 크고 낡은 집에 이사왔다 방이 너무 커서 우리가 모두 모서리를 차지하고 자도 닿지 않을 턱없는 집
나는 너를 가족에게 인사 시킨 적도 지나가는 말로 꺼낸 적도 없다
있나
퇴소식에 들러 인사를 잠깐 했던 적
있나 없나
하지만 우리는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없고
서로 죽은 날에 문상을 간 적도 없다
우리는 묵묵히 엎드려 걸레질을 했나
나만 안 했나
걸레질을 마치고 초코파이를 목이 메게 먹었다
세입자가 두고 간 앨범을 어떻게 처리할까 함께 고민했다
세상에 없는 너와
내 꿈에 있는 너와
내 꿈꾸는 드넓은 집에서
너의 역할을 계속 만들었다
방문객
축하객
내객
계속 앉아 있어선 안 되는 것
객식구


김복희, 「인조 노동자」,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 中



모든 인간에게는 최초의 자아와 이후 발생되는 자아가 있다. 이후에 발생되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자아이며, 때때로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폭력적인 세태에 영향을 받은 억압된 자아이기도 하다. (물론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성만두고 볼 때, 본래 자아에 더해 요구받는 정체가 있다. 모태를 지닐 수 있는 육체, 남성에 비해 유약한 생리적 특성으로 인해 여성은 스스로 가져야 할 정체를 강요 혹은 억압받아왔다. 여성은 사회에 노출됨과 동시에 늘 내재된 두려움을 갖는다.


김복희의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에는 다성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그 중 「인조 노동자」라는 시에서 ‘나는 너를 가족에게 인사 시킨 적도 지나가는 말로 꺼낸 적도 없다.’ ‘세상에 없는 너’, ‘내 꿈에 있는 너’를 포함한 ‘너의 역할’을 시인은 계속 만들었다고 한다. 여성 시인과 함께 살고 있는 ‘너’는 실은 ‘나’의 모습이다. ‘내 꿈꾸는 드넓은 집’에서 화자는 홀로 ‘방문객’, ‘축하객’, ‘내객’ 등의 손님을 여럿 창조한다. 그들은 여럿이서 일상을 나눈다. 왜 시인의 ‘크고 낡은 집’에는 단 하나의 ‘나’가 아닌 여럿의 ‘객식구’가 공존하는가.




어둠 속에서 화났구나 데런,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여자 혼자 산다고 말하지 않은 건 잘했어. 우린 겁우기니까, 데런.


… 디엔이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쓰며 거북이가 되자고 했다. 데런도 겉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다. 모자를 쓰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느냐고 디엔이 물었고 데런은 그렇다고, 거북이처럼 숨을 곳이 생긴 느낌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에 디엔이 좋은 건 아니네, 라고 했는데 데런은 얼른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좋은 게 아닌 게 평소에 늘 겁이 나 있다는 반증 아니냐고 디엔이 말했고, 데런은 그런가, 겁이 나서 거북인 것인가 했다. 디엔이 웃으며 설마 거북이가 겁우기에서 왔다고 말하는 거냐고 물었고, 데런은 진지하게 그렇다고, 겁우기의 우기는 이무기 할 때 그 우기가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때 디엔이 설마 하며 웃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데런은 기억의 타래가 엉망으로 뒤엉키는 느낌이었는데, 그건 그 모습 뒤에 항상 따라붙는 또 다른 디엔의 모습 때문이었다. 디엔은 울 듯 찡그린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조용히 데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이 시작되었구나 하고 말하듯.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은 ‘거북이’가 될 수밖에 없는 ‘늙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는 ‘늙은 여성’의 일상과 생각, 꿈이 얽혀있다. 여기에는 여성의 두려움과 분노, 폭력적인 현실 안에서 상처받은 여성적 자아의 억눌린 슬픔이 군데군데 누렇게 바랜 자국처럼 묻어있다.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릿속 어딘가가 천천히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데런의 눈은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다른 감각들도 조금씩 둔해지면서 온몸이 잠과는 다른 기묘한 무력과 둔감상태에 잠겼다. 아주 오래전 언젠가도 이런 상태로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한 디테일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마치 전생처럼 자신이 한때 이런 상태를 경험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망각 저편으로 넘어가버렸지만 어느 시절엔가 자신이 종종 이런 상태에 빠져있어 몸이 기억하고 있는 흔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런은 생각했다. 자신은 끝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토록 희박한 유사성만으로는.




주인공 데런은 디엔과의 일상을 회상한다. 이 작품은 주로 불분명한 기억을 더듬어 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데런’과 ‘디엔’이 남성과 여성인지, 여성과 남성인지, 남성과 남성 혹은 여성과 여성의 동성 조합인지는 작품의 후반부에서야 밝혀진다. 사실 데런이 현재 디엔과 함께 살고 있는지, 디엔이 데런에게 실제로 타자가 맞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즉, 이들이 각각의 개별 주체인지, 하나의 주체에 묶여있는 두 개의 자아인지도 사실은 불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흐릿한 기억의 전개 속에 분명한 것은, 어쩌면 디엔은 데런에게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며, 그 이유가 데런의 ‘어찌해볼 수 없는 재앙’이며, 작품 속에서 ‘알레르기 증상’으로 은유된 이상한 ‘고질병’일 수도, 또한, 그 ‘고질병’은 둘이 학창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서 그들 스스로를 구제해내지 못했던 슬픈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 혹은 오랜 무의식적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초반부와 말미에 데칼코마니처럼 등장하는 디엔과 데런의 ‘꿈’에서 서로가 죽어있으며, 그것에 대한 증언을 ‘아는 얼굴도 아니고, 안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렇다고 생각할만한 얼굴’의 대상으로부터 강요받는 상황인 것은, 이들 데런과 디엔이 결국엔 ‘여성’ 하나의 화자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방식이기도 하며, 이 노인인 여성 자아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죽음으로 사라지게 할 수밖에 없었으며, 사회에 만연한 익명으로부터 ‘부도덕한 스티치 작업’을 했다는 이유로, 늘 억압받아왔다는 사실, 자신의 정체가 소멸한 이유를 증언하는 것이 여성에게는 순수하고 참혹한 슬픔 그 자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 데런은 그때였다고 생각한다. 디엔의 꿈속에서 오래전에 죽은 걸로 등장한 자신이 오래전에 죽은 순간은 바로 그때였을 거라고. 끄라고! 디엔이 얻어맞은 직후에 자신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진 건 그때 자신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걸, 완전무결하게 무력했다는 걸 의미한다고. 끄라고! 그 주문은 담뱃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 그들의 사랑을 향한 것이었다고. 끄라고!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자신의 내부에서 고요히 작열하던 무력감이 정신의 어떤 연결 퓨즈를 태워버렸을 거라고. 끄라고! 그 분노와 절망과 공포가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이 응결시켰으리라고. 끄라고! 못 끄겠다고 말한 건 디엔이었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는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다고. 끄라고! 끄라고! 끄라고! 꺼지지 않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는 거라고!




일상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주체가 반응하는 방식은 대개 억압되어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품위와 교양, 윤리와 도덕을 요구받기에 그 양상은 더욱 뚜렷하다. 하지만 정제되지 않은 폭력적인 생각과 낡은 관념은 다시 상처를 만들고, 그것은 개인의 내밀한 마음 안에서 덧나고 곪아서 왜곡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이라면, 여성은 목을 제 몸 안으로 숨겼을 때 비로소 안전함을 느끼는 ‘거북이’가 될 수밖에 없다. 무력한 여성의 일상에 내재된 기억들은 본 작품 안에서 꿈으로 재현되고 있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끝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현실, 끝내 실현되지 못한 ‘지속적인 소음’처럼 불편하고 찝찝한 폭력에 노출된 채 늙어간 여성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늙은 여성들은 그들만의 일상 안에서 잠을 자고 슬픈 꿈을 꾸고, 그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상처 받은 자의 위무 - 기준영 <사치와 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