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 수첩 - 아니 에르노 & 셜리 잭슨
나는 운동을 끝내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길 위에는 각자의 일상에 골몰한 사람들이 각자의 여정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안식처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각자의 사람, 가장 위안을 주는 가족들이 있는 그 안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을 나는 마치 신도 아니지만, 사람도 아닌 존재라도 된 것처럼 무감해진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개입하지 않는 거리의 관찰자였고 사람들은 객체가 되었다. 나는 소설가 구보 씨처럼 두리번거리면서 동네를 활보했다. 아랫배가 뜨겁게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의 두 눈은 길 위를 떠돌다 객사한 랭보의 것처럼 우울해졌다. 거리에는 실존의 생물과 사물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음에도 나는 외로웠기 때문에 나의 내면은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텅 빈 상자처럼 공허했고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허탈했고, 환멸을 느꼈다.
나는 여성의 무력함에 대해 생각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공동체가, 사회가, 국가가, 세계가 구축해왔던 그 만의 고유한 틀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떠올렸다. 여성이 세계 속에서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안전한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무력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하는 여성들을 떠올렸다. 버지니아 울프나 아니 에르노와 같은 여성 작가들의 용기 있는 고백과 선언을 생각해보았다. 참 많이 나아졌다고, 충분하다고, 이제는 역으로도 생각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들 앞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는 스스로를 알아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기운이 없었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편과 다소 회의적인 편으로 나누자면 후자에 가까웠다고 푸념하듯 고백한다. 곤란한 상황에서 ‘편리’를 위해 답변을 회피했고,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방법을, 올바른 선택을 알았음에도 그것을 손쉽게 유예하는 방식으로 세계에서 살아남았음을 인정한다.
내가 접했던 여성 서사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은 아니 에르노의 『사건』이었다. 여기서 “사건”이란 아주 사적인 여성의 이야기인데, 작자는 여성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이를 “사건”이라고 명명한다.
“일주일 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런 사건조차 내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건』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했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개인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혹은 아주 고통스러웠던, 절대로 누락할 수 없는 필연적인, 하지만 미시적인 이야기를 “사건”으로 분류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겪을 수밖에 없었던 청년 시절, 중절 수술의 일을 진솔한 경험담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에르노의 문장은 냉철하고 건조하다. 그는 담백하게 “여성의 말”을 고백한다. 작가는 이 피치 못한 “사건”에 대해 스스로 어떤 태도로 회고하고 진술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을 드러낸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감정에 근접하였으며 그만의 분별력 있는 시선과 타인의 공감 속에 진술되는 진솔함은 참된 지성의 도리를 보여주었다. “사건”의 고백을 통해 그는 분명 문명을 위한 여성 서사의 용기 있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아니 에르노가 『사건』으로 1960년대 당시의 금기와 억압을 견딘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직접 고백했던 것에 반해, 셜리 잭슨에게 고백의 기회는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에르노보다 조금 더 억압된 시대에 살았고 은폐된 ‘자기만의 방’ 안에서 자기만의 서사 방식으로 구현한 이야기를 읊조린다. 특히 마을의 유서 깊은 통과의례에 빗대어진 마녀사냥을 그린 단편 『제비뽑기』는 그 짧은 서사를 통해서 가장 문학적인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단편 『유령 신랑』에서는 서른네 살의 미혼 여성의 히스테릭한 시선을 집요하게 구축해냈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은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그렸다는 점에서 셜리 잭슨의 『유령 신랑』과 비교해볼 만한 작품이다.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아내가 부재중인 집 앞에서 시위를 한다. 집으로 들어선 그는 아내가 남긴 메모를 불신한다. 아내는 집을 정리하지 않았고, 음식은 차갑고 딱딱하며, 탁상시계는 고장이 났고, 욕실은 지저분하다. 그는 아내의 부재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외로움을 느낀다. 그때 사물들은 갑자기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보다도 더 인간적으로 움직이는 사물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스스로 차라리 사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셜리 잭슨의 『유령 신랑』에서도 ‘제이미’라는 존재 여부조차 부정확한 신랑을 기다리는 여성 주인공은 매우 고립된 인물로 묘사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과 셜리 잭슨의 『유령 신랑』이 공통된 지점은 두 주인공 억압되고 고립된 배경 안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령 신랑』에서는 보편적인 인간, 혹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타인의 방』에서처럼 제대로 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웃들 앞에서 『유령 신랑』의 주인공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리고 이웃들은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것 같다.
“왜 시트를 가는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 금방 새 시트를 깔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왜 여자 주인공은 매사 조심스러운가.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걸리면’ 그녀가 속한 사회 안에서 한 순간에 매장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조롱거리인 것 같으며, 그것을 주인공도 잘 알고 있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노력한다.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에 자신이 얼마나 잘 맞춰져 있는지를 설득하려는 주인공의 태도는 매우 불안하고 히스테릭하다.
“목욕을 하고 새 수건으로 닦은 뒤 바구니에 집어넣고 다른 새 수건을 걸었다.”
혼례 예식에서 신부는 늘 하얗다. 백옥의 분을 칠하고 붉은 입술을 바른 여인, 아름답고 고요하며 순결한 새 신부의 모습은 매우 통념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목욕을 하고 ‘새 수건’을 걸어 둔다. ‘새 수건’을 금방 걸었음에도 곧 다시 걸어둔다. 새 시트를 자꾸만 간다. ‘서른네 살’의 주인공은 ‘실제보다 더 예뻐 보이려고’ 원피스를 고르는데 매우 심사숙고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내게는 재능과 유머가 있어요. 나는 숙녀예요. 남자를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줄 확고한 인생관과 자존심과 애정과 섬세함을 갖추고 있죠. 보기보다 큰 힘이 있어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광적으로 찾아 헤매는 신랑 제이미는 결국 나타나지 않는다.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 신랑’을 위해서 주인공은 언제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걸까. 한편 『유령 신랑』이 심리극에 가깝다면, 『제비뽑기』는 완벽한 플롯 연극에 가깝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한가로운 여름날의 한 마을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논다. 도입에서부터 아이들이 돌을 주머니에 챙기거나, 쌓기 놀이를 하고 있다. 흔히 나무나 풀, 흙과 돌멩이와 같은 자연과의 어우러짐은 평범한 아이들의 놀이 방식이기에, 푸른 초록이 가득한 마을의 풍경은 더욱 여유롭고 평화롭게 보인다. 그러한 가운데 문제의 ‘제비뽑기 의식’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를 독자가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야기가 ‘제비뽑기’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독자의 궁금증을 원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충격적이게도 나무랄 것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이 마을의 ‘제비뽑기’의 주인공은 납득할 수 없는 폭력의 대상, ‘희생양’이다.
“남자들이 도착하고 얼마 안 있어 여자들이 빛바랜 실내복과 스웨터 차림으로 들어섰다. 서로 인사한 그들은 짤막한 소문을 주고받고 남편에게로 합류했다. 남편 곁에 선 여자들이 네다섯 번은 소리쳐 부른 다음에야 아이들은 마지못해 다가왔다. 보비 마틴을 붙잡으려는 엄마의 손을 휙 피해 돌무더기로 달려가며 깔깔 웃어댔다. 아버지가 날카롭게 부른 후에야 얼른 다가와 아버지와 큰형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싱그러운 여름날의 평범한 마을로 포장된 이 소설의 전개 중 작가가 어떠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돌을 고르는 아이들 다음에 등장하는 남자 어른들과 여자 어른들의 작고 사소한 행동양식에서도 남성 중심의 가부장 문화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이들도 가부장, 즉 남성이 모성인 어머니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꺽다리 소년 ‘왓슨’네 아들이 올해 직접 제비를 뽑자 모두가 흐뭇해하며 덕담을 던진다. 가장 연로한 인물로 보이는 ‘워너 영감’은 ‘요즘 젊은 놈들’을 비난하며, 소설 전개되는 장면의 곳곳에서 잊을만하면 등장하여 ‘라떼는’ 식의 푸념이나 훈수를 둔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복음 8장 7절
요한복음에서는, 구약의 십계명을 들어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냐고 묻는 자에게 예수는 ‘죄 없는 자’만이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도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 『제비뽑기』속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들이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선별한 희생양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
요새 젊은이들이 쓰는 말 중에 ‘감정 쓰레기통’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터넷 상, 혹은 친한 친구에게 자신이 일상 속에서 차마 표출하지 못했던 사소한 감정의 찌꺼기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 속에는 ‘최초의 상자’, ‘검은 상자’가 등장한다. ‘최초의 검은 상자’는 우리가 마치 쓰레기통에 그렇게 하듯 던져버렸던 무수한 억압의 결과들, 무책임한 혐오나 무분별한 비난,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무한히 담아낸다. 그 과정에서는 언제나 의도치 못한 억울함을 수반한 강요된 희생자가 발생한다.
평범한 일상은 물론 ‘광장 무도회’나 ‘십 대 클럽’, ‘할로윈 파티’와 같은 우리 모두의 축제에 여전히 만연한 폭력과 억압의 본능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규정하여 규제해야 하는가. 시대를 거듭할수록 충분히 수면 위에 드러난 이 부끄러움, 우리가 알고 있는 못난 인간 본능의 기제에 대한 성찰은 어느 길목에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해결의 기초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것은 오로지 사랑이 아닌가. 타의에 의한 강요나 무책임한 억압이 아닌, 생을 향한 성숙한 고찰, 그것을 넘어서서 스스로 일으켜낸 부드러운 웃음, 다독임으로 일으켜낸 다정한 힘. 불가해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사랑’과 그 연대이다. 나만의 생이 아닌 타의 생으로까지 사랑으로 연결하는 힘. 연대는 그 힘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리고 여성의 몸은 신비하고 무력하다. 해가 거듭할수록 여성의 정체를 가진 나는 몸의 무력함 속에서 나태해져 간다. 하지만 나는 슬픔과 절망의 감정보다 사랑과 희망의 감정의 수(壽)가 더 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의 배신과 반목에도 계속해서 사랑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여성의 자아를 가진 주체로, 깨어있는 눈과 가슴의 감각을 믿는다. 여성의 몸으로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본 현실을 마음으로 희석한다. 그곳이 내 사랑의 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