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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May 13. 2021

버드나무 이야기에 관하여

OE 시론 - ESSAY


버드나무와 소년, 그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이야기를 생각해낸 것은 2018년이었다. 그때 나는 재직 중이었고 명동에서 서대문 인근으로 외근을 나가던 와중이었다. 카니발에는 두 명의 상사 분들이 뒤에 타고 있었고, 나는 기사 분 옆에 조수석에 앉아 있었지만, 실은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있었다. 


나는 그 초록의 심상에 깊이 사로잡힌 채 약간 들떠있었다. 나만의 헤테로피아 속에 스스로를 이입시킨 채로 이상한 즐거움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직 생활을 하면서도 도피의 일환으로 종종 그런 자폐적인 상상의 방 안으로 스스로를 피신시켰다. 결론적으로 그 이야기가 언어로 구축되었을 때도 읽는 사람들이 좀처럼 내가 창조한 그림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세계관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쁘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도심에서 이질적이고 낯설게도 초록의 생물을 마주친, 그것을 바라보다가 마음 안에서 모종의 충격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가능하면 초록의 생물은 아이에 가까운 순수한 정체를 가지고 있기를 바랐다. 나 나름의 미니멀한 언어를 썼고, 조용하면서도 조금은 원초적이고도 야생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시를 다 써냈을 때 그 시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몇 해에 걸쳐서 그 장면을 언어로서 구축하려고 애썼지만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생각한 그림으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 장면을 생각해낸 게 2018년이었으니 지금은 3년이 흘렀다. 나는 3년 동안 약간씩 언어를 쳐내고 일부 단어들을 교체해보기도 했고, 처음과 끝을 바꾸기도, 서사의 중간 부를 보완하기도 했다. 다양한 수정을 시도하고 나서도 여전히 평자(평자라고 해봐야 지인들이나 스승님, 동료 학생들뿐이지만)들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모자이크’의 인상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은폐하지 않고 정직한 문장을 쓸 것이다. 조금 더 짙은 감정을 세세히 추가할 것이다. 그 시도는 아래와 같다.






2-1 버드나무 청년



청년은 초록색의 안전모를 쓴 거리의 인부였다 

그는 거리에 흩어진 푸른 먼지를 손으로 수거하는 일을 했다


푸른 먼지는 거칠고 끈끈한 물질이어서

그것들을 길 위에서 하나하나 떼어내어 상자에 골라내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도심을 걷는 세련된 사람들이

길 위에서 노동하는 그를 흘끗 쳐다보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그날 

그는 고생을 했다

푸른 먼지 사이에 작은 돌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돌이 날아들다니! 

청년의 하나뿐인 상사가 허공에 대고 푸념을 했다 


상사가 큰 소리를 내자 

도심을 걷는 세련된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기도 했다


건너편에서 새로 짓는 건물에서 날아 온 파편이라고, 

하지만 돌들도 본래 푸른 먼지들과 다름없다고 

상사는 말했다


늙은 상사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그는 푸른 먼지가 담긴 상자를 제 품에 안고 주저앉았다


나뭇가지가 길 위에 구르다

도로 변에 섰다


청년에게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작은 가죽 가방을 든 여인이 서 있었다


청년은 어깨에 붙은 푸른 먼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모른 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청년은 여인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왕잠자리 한 마리가 날았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도망치는 꼬마처럼 왕잠자리는 

바람을 유영하듯 온 몸을 흔들며

도로 변으로 사라졌다


- 시간 안으로 쌓여가는 돌이여,

상사가 거리에 주저앉은 채로 울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상자를 길 위로 내팽개쳤다


작은 가죽 가방을 든 여인은 

차가 밀집한 도심의 도로 위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푸른 먼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서 청년의 온몸은 푸르게 되었다


- 시간은 내 것이었던 적이 없어

상사는 중얼거렸다


푸른 얼굴의 청년은 눈알 속에 스며든 끈끈한 초록의 먼지 가루들을 황홀한 듯 어루만졌다






여기까지가 수정한 내용인데 문제는 “여인”이 등장하는 10연과 11연, 15연이었다. 나는 시를 다시 써 내려가는 중간중간에, 그리고 시를 완성시킨 다음에도 몇 번 씩을 반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묵독을 해보았지만, “여인”이 등장하는 부분이 계속해서 인위적으로 느껴져서 괴로웠다. 나의 최초 심상에는 분명 스스로의 자아가 개입된 여성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꼭 필요한가?


결론적으로 나는 여인이 등장하는 부분 자체를 삭제하게 되었다. 약간의 아쉬운 감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스스로 작품 앞에서 엄격해지기를, 그래서 자율성을 찾은 시가 시 스스로 일어나기를, 작자는 개입되지 않기를 바랐다. 어쨌든 여인의 그림을 넣으려는 것은 나의 인공적인 의지였으니까. 쓰고 써도, 보고 또 봐도 고칠 게 계속 늘어나는 게 문학작품이라지만, 어찌 됐건 끝을 내야만 했다. 나름의 종료를 결정하고 나서 나는 수업에 갔는데, 수업에서 교수님께서는 ‘내버려 두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좀 더 시가 스스로 운신해나가도록 내버려 둬야 함을, 구체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아래는 이렇게 저렇게 고쳐 본 ‘버드나무 이야기’이다. 






1-2 바라 봄



소년은 멈춰선 택시 안 승객을 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앙 다물고 있었다


회색 가죽 속 파묻힌

목덜미가 바닥에 굴러 떨어질 듯 

위태로운 사람의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장면이

퍽이나 잘 어울려보였기에 소년은 몇 번씩 눈을 주어 바라보았다


여인을 보다가 들뜬 소년은

약간의 황홀함 속에

소년은 어깨에 붙은 그림자를

철컥철컥 떼어 옮기고 있었다

그는 소임을 하는 거리 인부였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구르다

도로 변에 섰다 


시간은 내 것이었던 적이 없어

소년이 중얼거렸다


*


여인은 소년을 보았다


시간 안으로 쌓여가는 돌이여, 


소년이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여인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차가 밀집한 도심의 도로 위에서 

택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달뜬 얼굴이 되었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기도 하는 어린 남자 아이의 얼굴이 하도 신기해서

여인은 꽤 오래도록 눈을 두고 보았다 


소년의 둥근 얼굴 모양을 따라 선을 그려 보았다

검지손가락을 들어

스러지는 찬 기류를 거슬러 휘휘

선을 그릴 때 부푸는

속수무책 버드나무 한 그루


나는 찢기고 싶지 않아

무심한 손끝 엇박으로 춤추는

버드나무

 버드나무


잎사귀가 차례로 하늘빛을 닦고 있네

빛에 닿은 잎의 면면은 얼마만큼 뜨거울까

여인이 중얼거릴 때 

흩어지는 버드나무 가루가 공중에 부유하였다


*


왕잠자리 한 마리 날았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도망가는 꼬마처럼 왕잠자리는

바람을 유영하듯 흔들리며

도로변으로 사라졌다


여인과 소년의 두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도심에서, 

한숨을 내쉬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덕지덕지 묻은 가루가 사방에 흩어져서 

소년의 얼굴을 푸르게 만들었다


푸른 얼굴 소년은

눈알 속 깊이 스민

초록 가루가 끈적거릴 때까지

여인을 바라보았다






2-2 (최종) 버드나무 청년



청년은 초록 모자를 쓴 거리 인부였다 

그는 거리에 흩어진 푸른 먼지를 수거하는 일을 했다


푸른 먼지는 거칠고 끈끈해서

길 위에서 떼어내 상자에 골라내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도심을 걷는 사람들이

노동하는 그를 흘끗 쳐다보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그날 

그는 고생을 했다


푸른 먼지 사이에 작은 돌멩이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 돌이 날아들다니! 

청년의 상사가 허공에 대고 푸념을 했다 


상사가 큰 소리를 내자 

도심을 걷는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았다


건너편에서 새로 짓는 건물에서 날아 온 파편이라고, 

하지만 돌멩이도 본래 푸른 먼지와 다름이 없지 않느냐고

상사는 청년에게 되물었다


늙은 상사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그는 푸른 먼지가 담긴 상자를 제 품에 안고 주저앉았다


나뭇가지가 길 위에 구르다

도로 변에 섰다


- 시간 안으로 쌓여가는 돌이여,

상사가 흐느꼈다

그는 품 안에 들고 있던 상자를 길 위로 내팽개쳤다


왕잠자리 한 마리가 날았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도망치는 꼬마처럼 왕잠자리는 

바람을 유영하듯 온 몸을 흔들며

도로 변으로 사라졌다


푸른 먼지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서 

청년의 온몸이 푸르게 되었다 자라나는 야생 나무의 풀과 줄기처럼 순식간에 먼지가 들러붙는 바람에 청년의 모습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 시간은 내 것이었던 적이 없어

상사가 중얼거렸다


푸른 얼굴의 청년은 눈알 속에 스며든 끈끈한 초록의 먼지 가루들을 황홀한 듯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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