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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Jul 19. 2024

꿈의 변이

효구 비평 -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 방법론을 연습하며


본 글은 계간 <현대수필> 2024년 가을호에 수록 예정인 수필입니다. 



A dark green umbrella which has black-dotted patterns around its edge      

- 꿈의 변이,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 방법론을 연습하며     







외출하려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게 우산이 있었던가?’      


금세 나는 몹시도 근심스러워졌다. (나의 유일한 계획은 ‘외출’이며, ‘외출’을 지체하게 할 만한 방해 요소라면 어떤 것도 미리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급히 우산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니 웬걸, 우산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것은 예쁜 삼단 우산이었다. (그것의 외양과 색깔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우산이었다.)      


나는 삼단 우산을 꺼내 쓰고 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 꿈 기록, 2021. 1. 30.       


   


 매일 꿈을 꾼다. 이틀 내내 야근을 하거나 마감으로 연일 밤샌 날이든, 전날 9시간의 통잠을 자고 일어나 기운 생생한 하루를 보냈든, 컨디션에 상관없이 거의 매일 밤 꿈을 꾼다. 꿈을 꾸는 것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었다. 꿈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 다양한 사건을 만든다. 나는 꿈속에서 당사자이자 목격자로, 일련의 비현실적인 사건들을 겪거나 관찰하며, 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압도당한다. 현실에서라면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꿈속에서는 엄숙한 당위성을 가지고 발생하고 또 발생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꿈에서 일으켜지고 나면 나는 아침에 눈을 떴으니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해야만 하는, 2024년에 서울의 일상을 살고 있는 평범한 30대 중반의 여성이다. 잠에서 깨니, 어안이 벙벙. 무슨 얼토당토않은 일이 일어났던 거지? 


 얼마 전에는 이사를 했다. 꿈을 꾸지 않는 방책으로 침실에서 침대의 머리 방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왔던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새 침실에서의 방향을 이리저리 따져보며 심사숙고하였으나, 이사하기 전 집의 침실에서 침대 방향을 세 네 차례 옮겼던 전례를 떠올리며 미리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의 초조함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결국 침대 방향을 바꾸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병원에 가서 그에 맞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보리라 다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천하지는 못했다. 클리닉이나 전문 기관을 리서치 해본다면 그에 맞는 답안을 가지고 있을 전문가를 찾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내가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인지, 막연히 불신하였다. 물론 집 근처에 있는 정신의학과 정도는 금방 방문할 수 있을 테지만, 혹 약물 치료라도 권하게 된다면? 약물 치료는 겁이 난다. 행여 의존하게 될까 두렵고, 부작용이라도 생길까 걱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차치하고, 결정적으로는 이 증상이 내 목숨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결정적인 방해 요소는 아닌 거다. 어쩌면 나는 이 질환(?)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지?


 나는 주변에 묻기 시작했다. 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주 꿈을 꾸나요? 세미나에서 질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나는 꿈에 대해 묻는다. 무슨 꿈을 꾸시나요? 꿈을 꾸긴 하지만 잘 기억은 안 난다는 반응이 대다수이다. 나처럼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꿈을 꾼다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나는 정말이지 거의 매일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는 올빼미와 하얀 고양이가 나타나고, 거대한 수영장을 헤엄치는 작은 우럭 두 마리를 본다. 꿈속에서 나와 엄마는 커다란 양배추와 호박을 들고 나란히 걷는다. 어느 날에는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조합으로 나타나고, 오래전 결별했던 사람들이 마치 그런 적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등장하여 내내 곁에 머무르며 기묘한 사건의 주인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지배한다. 나는 스스로가 제법 특이한 체질이라 판단하고, 그것을 기록하기로 했다. 



기억은 종종, 적어도 약간이라도 조작을 한다. 대개는 당신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 리디아 데이비스, 「형식과 영향력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



  하지만, 꿈 기록에는 약간의 각색이 들어있다. 내가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바로 기록했던 내용은 거친 초고에 불과하므로 이 글을 적어 내려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기억의 혼동과 무의식적인 조정 의지가 개입한다. 각색 없는 꿈은 없다. 꿈속의 사건을 기억하는 주체는 그것을 그만의 당위적인 맥락 속에 외로이 경험했던 ‘단 한 사람’이며, 이 ‘단 한 사람’ 외에 그 누구도 동일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 꿈의 실체는 완전하지 않은 기억의 흐릿한 형상 안에서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을 읽는 이에게 알리기 위해 꿈꾼 이가 선택한 한정된 언어를 도구 삼아 할 수 있는 한 선명하게 구현하여 전달해야만 한다. 나는 꿈 이야기의 초고를 읽었을 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실제인 것처럼 장엄하고 위대했던 꿈의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감화되지 않을 독자의 입장이 안타까우므로, 조금 더 섬세하게 수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외출하려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게 우산이 있었던가?’     

 

급히 우산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니 웬걸, 우산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것은 짙은 녹색의, 가장자리 부분에 검정색 점무늬가 새겨진 삼단 우산이었다.     


‘우산은 어떤 신호일까?’     


나는 우산을 꺼내 쓰고 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누가 그것을 자리에 두었을지 궁리하며.


 - 꿈 기록(각색), 2021. 1. 30.(2024. 6. 15)     




 위에 각색한 21년 1월 30일의 꿈 기록의 경우, 우산의 부재를 알아챈 화자의 초조함을 설명하려다가, 지나친 맥락과 설정의 추가가 이야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하여 삭제하였다.1)  한편, 우산의 외양과 색깔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분명 꿈에서 느꼈던 감각 그대로의 전달을 제한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색을 정하였다. 하지만 ‘짙은 녹색의, 가장자리 부분에 검정색 점무늬’의 결정은 매우 주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꿈의 기억과의 일치를 보장할 수는 없다. 슬프게도, 실제로 나는 꿈에서 어떤 색의 우산을 보았는지 지금으로써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이 기록을 읽는 이에게 선명한 경험으로써 마치 꿈의 실황을 복제한 듯 일치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리디아 데이비스의 말대로, 그저 나 자신이‘기억하고 싶어 하는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우산을 하나의 ‘신호’로 의미 부여한 것은 또 다른 전개에 대한 가능성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누가 그것을 거기에 두었을지 궁리하는 화자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으로 드러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동시에, 새 이야기 전개에 앞선 작은 힌트를 삽입한 것이다. 


 최근 리디아 데이비스의 다양한 작법 시도를 알게 된 나는 약간의 용기를 얻어 근 몇 년간 다이어리에 지렁이 글씨로 흐릿하게 기록했던 꿈 기록 초고 몇 편을 각색해보기로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각색한 글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언어로 표현해내려고 할수록 이야기들은 고유한 느낌과 감성을 잃어만 갔다. 실제 꿈의 경험과 감각은 사라져가고, 새로 창작한 기록만이 마치 자신이 본래의 고유한 성체인 듯 행세하였다. 


 기록이 기억을 왜곡하고 있었다. 꿈의 고유함을 깊숙이 복기해 기록하려는 노력으로, 성스러운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고 있다. 기록은 이렇게도 방종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행세하는 것이다. 꿈은 그저 견디고 있다. 무구한 언어가 가책도 없이 저지르는 전체의 변환을. 어쩌면, 훼손하지 않은 엉성한 초고만이, 초고에 적힌 일개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연상과 그것의 무의식적 리듬만이 숭고한 꿈의 영역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일까.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날 밤의 꿈 기억을 더듬는다. 개미 떼가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 기둥을 서서히 장악하듯이, 탐욕스러운 오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어두운 물속을 향해 오래 잠영하듯이. 남편은 감은 나의 눈두덩이가 징그럽게 요동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당신은 모르지, 아 이토록, 완벽한 나의 세계!     




꿈을 꾸었다.

먼 지평선에 남자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내게서 아주 먼 바다에서였다.      


나는 그 꿈을 생각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출근길이었다. 

길 위에 노상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아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보였다. 그의 피부는 빛에 세게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      


어느덧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도 노인은 멍하니 한 군데를 응시하며 앉아있었고, 그 자리는 아침에 보았던 곳과 다른 마을의 어딘가였다.      


나는 그 길목에서 아침에 내가 꾼 꿈을 떠올렸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인지 바다가 멀게만 느껴졌다.      

먼 지평선에 청년 둘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 꿈 기록, 2021. 9. 10.





1) 리디아 데이비스는 맥락은 설명이나 상세한 해설을 뜻할 수 있으며, 맥락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소재가 원래 지니고 있던 흥미로움이 모조리 사라질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형식과 영향력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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