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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구 Aug 19. 2020

침묵이 밀어 낸 말
2. 1970년, 은강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 읽기

2. 1970년, 은강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있었다.
밀물 때 그곳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해면의 파랑이다. 그 해면이 하루에 두 번씩 높아졌다 낮아졌다 해 은강 전체가 지구 밖 천체의 인력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은강의 면적은 백구십육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팔십일만 명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와 비교해보면 면적도 넓고 인구도 알맞은 편이다. 그런데도 ‘갑갑하다’는 말을 은강 사람들이 하는 것은 그들의 기질, 또는 생활 안에 바깥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깊은 회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 통제와는 상관이 없는 관찰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의 활동 구속을 불만으로 말할 사람은 그곳에 하나도 없다. 진정한 사회학자라면 그 사회의 현상·구조·성질·변동에 대하여 적합한 기술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특징 그대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은강은 버려진 도시이다. 
『기계 도시』 中




김승옥의 소설 『무진 기행』의 배경 ‘무진’은 작가가 구상한 실재하지 않는 도시이다. 이와 비슷하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창조된 도시는 ‘은강’이다. ‘무진’이 소설 속 배경으로서 안개를 통해 그 축축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역할로서 초점을 둔다면 ‘은강’은 작가에 의해 수치화되고 정보로써 조금 더 구체적으로 건설된다. 마치 수도권 어딘가에 있는 변두리 도시 몇 군데를 골라 읊어 보아도 틀리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려진 도시 ‘은강’은 연작 중 『기계 도시』 외에도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씨의 병』에서 자세히 언급된다.




경제개발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당시의 정부는 기업을 발전, 육성시키기 위해 많은 지원을 해 주었고 ... 또 특정 제품에 대해서는 특정기업에만 생산 독점권을 기술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완전 독점 방식으로 국내 기업들의 성장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다. ...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저임금 구조와 경제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부동산 가격의 급등은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에 크게 한 몫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산업 자본주의는 매력적인 자태를 선보이게 되었다. ...

최용근, 『명동 30년-금융의 격랑을 헤치며』, 신세림, 2002, p75~p76.


1962년부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이 야심찬 계획은 기본적으로 많은 투자와 재원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수출을 장려했다. 70년대 초부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의 경기가 부진하였는데 이에 대해 경공업 제품 위주의 한국 수출은 미래 전망이 밝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더불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이어서 미국과 중국 간의 외교관계 성립으로 한국도 자립적인 산업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선진국은 석유 파동을 맞아 에너지 다소비형인 중후장대형 산업을 한국, 대만, 브라질, 멕시코 등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 분야에서의 투자를 서두르려고 했다. 

1972년 8월 3일 박정희 정부는 ‘국민경제의 안정 내지는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8·3 경제조치’를 발표한다. 금리 동결, 특별대환 자금의 방출, 신용 보증 기금의 설치, 산업 합리화 추진, 조세 행정의 집중화, 금리 및 물가동결을 주축으로 하는 이 행정 조치는 그 번지르르한 명분을 앞세워 국가기구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기업의 채무를 동결시킨 규제 조치였고 여기에서 재벌들이 많은 특혜를 받았다. 특히 (8.3 경제 조치의 하나인)산업합리화를 미끼로 기업의 합병, 흡수, 통합을 국가기구가 매개시켜 준 점은 72년 이후의 자본운동, 즉 문어발식 기업 합병에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부분의 재벌이 비록 1960년대 이전에 설립되었지만 재벌의 가장 빠른 성장 시기는 1960년대와 1970년대였다. 정경유착의 초기 모습은 1960년대 귀속재산 불하와 원조 배분의 경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나타났으나 1970년도에는 수출 장려의 경제 정책은 다각화되고 결합 확장적인 성장 주도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벌들에게 더욱 유리했다. 소설 속 ‘은강’은 부패한 독재 정부와 결탁한 재벌이 그들의 힘을 키우고 연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에게 철저하게 사용된 만들어진 불모(不毛)의 공간이다. 그들은 오로지 숫자로 환산된 결과에 충실하다. 이들의 기득권에 대해 현상 유지하려는 집착과 욕망, 상실에 대한 불안은 ‘생명’이나 ‘사랑’에 대한 가치를 잊게 하여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모순을 낳는다.





“… 너의 할아버지는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둘렀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요구에 따라 일한 적이 이때까지 없었어.”

『궤도 회전』 中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中
사람들의 사랑이 나를 슬프게 했다. … 내가 약하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는 제일 먼저 나를 제쳐놓을 것이다.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밝고 큰 목소리로 떠들 말들을 떠올리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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