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지 않는 날의 시작.
1월 1일, 설날, 그리고 새 학기가 이어지는 1월부터 3월, 다양한 시작에 맞춰 새로운 시작이 쏟아지는 시절이다. 새해 계획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새해 3일 차 정도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다짐을 바로잡기 위한 설날과 새내기도 아니면서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덩달아 시작하는 새 출발까지. 이때, 사람들의 MBTI 끝자리는 대부분 J로 바뀐다.
뭐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사람들처럼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취미를 찾고, 부자가 되기를 다짐하고, 책 읽기를 시작하고, 미라클 모닝이라는 예쁘지만 무시무시한 새벽 기상을 시작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뭐 한 십 년 전쯤에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워질 것과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강요한다. 강요는 강박이 되어 끝내기도 전에 다른 시작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짐을 하고, 다짐과 시작을 위해 고통과 불행을 참아낸다. 물론 고통과 불행은 뿌듯함이 되어 돌아오긴 하지만, 뿌듯함의 크기보다 포기하고 이불속을 뒹구는 기쁨이 더 클 때도 있다. (물론 그 기쁨은 죄책감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지만...)
TV와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시작에 대한 강박은 조급증까지 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사는 동안 누군가는 이렇게 저렇게 달라지고, 이런저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네? 엇. 나 가만히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TV를 끄고, 뭐라도 시작해서 SNS에 나도 잘 살고 있다고 한 마디하고, 좋아요 응원받고, 댓글로 너도 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 멋지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들이 아무런 시작할 마음이 없었던 나를 일으켜 세운다.
시작이 주는 설렘 반, 타인의 시작이 주는 불안감 반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다. 시작하기 전까지 들떴던 마음은 곧잘 부담으로 바뀐다. 쉴 틈 없이 해내야 하는 일이 쌓이고, '아 해야 하는데'와 '내일 하지'루프에 빠져 어떤 시작은 몸이 아닌 입에서만 오르내리다가 끝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끝내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은 다음 해 죽지 않고 돌아온다) 새해니까. 누가 하니까. 이러면 안 될 거 같으니까. 여러 이유에 등 떠밀 린 나의 시작은 제자리를 걷다가 이번에도 보기 좋게 실패하고, 내가 나에게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준다.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남들이 알아서 챙겨주는 이 스트레스를 나까지 동참하여 만들어내다니 참으로 바보 같았다. 만수무강을 위해선 스트레스를 줄여하고, 그 시작은 어쩌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 넘쳐나는 이 시절에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고, 어떤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는 날을 시작하기로 했다. 시작이 없으니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전에 없던 새로움을 발견할 일도 없을 것이며, 지금보다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도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망해버리거나,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어떤 성취감을 느낄 순 없겠지만 무언가를 멋지게 마무리해야 할 필요도 없고, 꾸준하게 해 나갈 부담도 없다. 그리고 텅 빈 하루를 기꺼이 낭비하다 보면, 언젠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무언가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별일 없는 하루들이 올해의 대부분을 채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