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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Nov 05. 2023

모자와 맥주 그리고 미술관

모자를 또 샀다. 이번에도 아주 가끔 쓰이다 ‘장롱 모자’가 될 것이다. 모자가 담기엔 너무 커다란 머리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쓴다’보다는 ‘얹는다’라는 말이 더 잘 맞는 느낌으로 모자를 착용하고 있으니까.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제조업체에 대한 약간의 원망을 하겠지만 그건 길지도 깊지도 않다. 그래서 대체로 실패로 끝난 모자에 대한 기억을 까맣게 잊고 또 모자를 산다. 야구모자도, 비니도, 한때는 버킷햇도 어울림과 상관없이 산다. ‘사진으로 봤던 그 모자가 맞나?’라는 의문은 ‘원래 모자는 원래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걸지도’라는 틀린 답으로 이어진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기꺼이 산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가끔 머리에 얹어질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살려줘’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모자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모자를 끊을 생각은 없다.) 

어젯밤에 맥주를 끊었고, 오늘 밤에 다시 맥주를 시작했다. 어찌 보면 1일차인 셈. 지금까지 많은 양의 맥주를 마셔왔고 앞으로도 많이 마실 거다. 날씨가, 기분이, 시간이, 사람이… 맥주를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혈관에 맥주가 마르지 않을 만큼 마셨지만 사실 맥주 잘 모른다. 라거와 에일 차이도 여러 번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고(아마도 술 먹다가 들어서 그랬겠지) 과일맛이나 IPA같은 특유의 맛이 나지 않으면 이 맥주가 저 맥주고 저 맥주가 이 맥주다. 한번은 맥주 박사와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원래도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는데 맥주까지 잘 아는. 나중엔 나무위키 켜고 이야기하는 거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들 정도로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맥주를 마시면 음~ 맛있다. 와 좋다. 시원하다. 한 병 더요! 정도의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좋아하는 맥주는 사실 맛보다 그걸 먹었을 때 분위기나 기억으로 결정하는 나에게 그 자리는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건 많이 아는 걸까. 많이 먹는 걸까. 많이 먹다 보면 당연히 많이 알아야 하는 건가. 아님 기억까지 다 말아먹어서 아는 게 없는 게 맞는 걸까.

일주일에 3번 이상 운동 가기. 서른셋이 되던 새해에 회사 헬스장에서 뭔가에 홀려 피티까지 끊어버린 날부터의 다짐인데, 지금까지 꽤 잘 지켜내고 있다. 30년 넘게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온 나에게 어쩌면 가장 큰 인생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됐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몸이 굉장히 좋아졌거나, 못하던 운동을 잘하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건강해진 기분만큼은 확실하게 느끼며, 건강검진에서 나쁜 소리 듣지 않게 됐을 뿐. 그래서 누군가 “운동하세요?” 혹은 ‘운동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당당한 대답 대신 ‘아… 네… 뭐 살기 위해 합니다’라고 얼버무리는 샤이 운동맨이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그건 확실히 다른 영역일 텐데 말이다.

취미는 미술관에 가는 겁니다.라고 말하면 “오? 좋아하는 작가 누구예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나는 “어… 그게…” 하고 거짓말을 한 사람처럼 머리가 하얘진다. 미술관에 가는 건 단지 그림’만’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예쁜 것들이 넘쳐나고, 조용하고, 어둠과 밝음이 선명한 그 공간이 그리고 거기에 내가 있는 시간이 좋을 뿐이다. 그곳엔 설명 없인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더 많고, 작가의 이름은 며칠이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하고, 작풍 앞에서 전율을 느끼거나 ‘좋다, 예쁘다, 멋지다, 굉장하다, 놀랍다…’말고는 작품을 논할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내가 미술관도 그 안에 전시된 작품들도 작가의 멋짐까지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대부분 ‘잘’이라는 글자로 이어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이 멈칫하거나 시들해지거나 초라해질때가 있다. 하지만 잘 몰라도, 잘 못해도, 잘 어울리지 않아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 건 지식도 능력도 아니고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크든 작든 잘났든 못났든.

(_라고 마음만 앞서고 머리는 따르지 않는 사람의 변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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