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J의 연락이란
코로나19가 한풀 꺾인 요즘.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한창 무르익는 가운데, 나에게 대뜸 요즘 H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 "H랑 어색한 사이인 것 같은데 왜 그래? 둘이 엄청 친했잖아"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평소 같으면 저렇게 끝내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솔직해졌다.
- "바쁜가 봐요. 많이."
서운함을 한가득 담아 한 마디 뱉어내고서는 말을 이어간다.
-"벌써 두 달 전이네요. 아니 안 그래도 약속을 잡고 싶어서 가능한 날을 다 말해줬고 본인도 물어본다고 해 놓고서는 아무런 말이 없네요. 그래서 다음에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서 아침에 운을 띄웠는데, 정확히 12시간 뒤에 답변이 왔어요. 그냥 하기 싫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그 이후로 연락하지 않고 있어요"
그랬다. 굳이 답변을 갈구하지는 않는다. 매달리기 싫다. 우선순위가 낮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굳이 끙끙 앓기 싫다. 게다가 상대가 별로 내켜하지 않는 눈치의 답을 하면 질질 끌고 가고 싶지도 않다.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면 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사람들이 가진 선,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둥글둥글하게 지내고 싶다.
-"주임님은 통제되는 걸 되게 좋아하시네요"
이제는 주임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로 오빠 동생 편하게 부르기로 한 친구가 말했다. 이 말이 술자리가 끝나고 며칠 뒤에도 기억에 남는다. 맞다. 예상되는 시나리오 안에서 발생했으면 좋겠다. 예측되지 않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 너무 싫다. 대신 그 시나리오는 엄청나게 다양하다.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을 걱정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바쁜 사람 건드려서 뭐해요. 바쁘다는 건 생각할 게 많은 건데 굳이 거기에 나라는 존재까지 넣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은 배려인가. 자신감이 없는 것인가.
-"그렇게 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 그래도 몇 번 더 말해보는 게 어때?"
-"자신이 없네요. 말했다가 괜히 부정적인 답변을 받으면 힘들 것 같아요"
자신감이 없는 것이다.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거절은 특히나 싫다. 최대한 맞춰주고 긍정적인 답변을 위한 설계를 하지만 그래도...
-"에이씨.... 안 그래도 H 이야기할까 봐 그냥 구렁이 담 넘듯 넘기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되네요"
그렇다. H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이 날 술자리 시나리오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최초 1순위로 세워 둔 대응 방법은 실패했다. 어디 사람 일이 생각대로만 흘러가는가.
그러다가 갑자기 주제가 MBTI로 넘어갔다. 각자의 MBTI 맞춰보기. 일단 나는 "I"는 확정하고 들어갔다. 그리고 "F". ISFJ다. 몇 번을 해봤지만 항상 같은 결과가 나왔다. MBTI가 모두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연락을 엄청 어려워한다. 메시지를 지우고 썼다가를 수 십 번. 답답하다. 하지만 어렵다. 생각은 많은데 행동으로 옮기기엔 엄청난 고민과 결심. 그리고 좌절.
나는 H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서로 말도 잘 통하고 리액션도 좋고. 특히나 이 친구는 말을 예쁘게 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다 다르지만 이 친구는 정말 특별했다. 엉뚱한데 똘똘하고 빈틈도 많다.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나와는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많다. 알고 지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다.
이렇게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막상 만나게 되면 서로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하지 않는 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그만큼 편하다는 건데 어째선지 연락은 어렵다. 어색한 사이는 아니야. 오히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적 친밀감은 높은데... 비단 나만의 생각인가.
그래서 추측해 보건대, H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쁜 것도 있겠지만 나와 같은 이유도 있으리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함부로 예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H는 그런 것 같다. 나 못지않게 생각도 많고 소심하고 낯가림도 심한 친구라서. 그냥 그렇다고.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 쓰여서 글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