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추진해 온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 마련이 예상보다 크게 지연되고 있다. 당초 올해 안에 기본 틀을 제시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금융당국과 정치권, 중앙은행 간 입장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입법 일정이 자연스럽게 뒤로 밀리는 분위기다. 현재로서는 최종 합의 시점이 2026년 초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여당이 요청한 12월 중순 스테이블코인 입법 초안 제출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금융위는 관계 부처 간 논의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추가적인 조율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단순한 일정 지연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을 누가 발행하고 누가 감독할 것인지라는 핵심 구조를 두고 내부 의견이 크게 갈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논쟁의 중심에는 한국은행의 입장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의 안정성과 금융 시스템 리스크를 이유로, 발행 주체를 시중은행이 과반 지분을 보유한 컨소시엄 형태로 제한해야 한다는 방안을 꾸준히 제시해 왔다. 그러나 여당 내 디지털자산 관련 논의에서는 이런 구조가 시장 진입 장벽을 지나치게 높이고, 민간 혁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은행 중심 규제보다는 기술 경쟁력과 글로벌 흐름을 함께 고려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기관 간 갈등의 본질은 스테이블코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있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을 사실상 통화 정책과 금융 안정의 연장선으로 보고 중앙은행의 역할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정치권과 일부 부처는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 금융 산업의 한 영역으로 인식하며, 특정 기관에 과도한 결정권이 집중되는 구조에는 선을 긋고 있다. 공동 협의체 구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최종 통제권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두고는 여전히 간극이 크다.
현재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2026년 1월 전후 여당 주도의 통합 법안이 공개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말과 연초 사이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자문 논의가 예정돼 있으며, 이 자리에서 은행 컨소시엄 요건과 감독 체계 같은 핵심 쟁점이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부 부처 간 입장 차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경우, 정치권이 독자적인 입법안을 추진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스테이블코인이 결제 수단과 금융 인프라의 중요한 축으로 빠르게 부상하는 가운데, 한국의 규제 방향은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혁신과 안정성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인지, 그리고 글로벌 경쟁 속에서 한국이 어떤 위치를 선택할 것인지에 따라 향후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번 입법 지연은 단순한 행정 문제를 넘어, 한국이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둘러싼 고민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