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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잎 Mar 25. 2019

[영화] '우상'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선

'당신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영화 우상

- 이 영화는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한 시사회로 관람을 하였습니다.


- 영화와 문학, 예술 작품 등 다양한 것들의 결합을 통해 다채로운 관점으로 감상평을 써보았습니다.


-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과 결말이 담겨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기회를 주신 브런치 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우상: 유화 작품처럼 수많은 '이미지'와 '은유'가 덧칠된 영화


물음표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많은 질문과 의문이 들었고 이에 관한 답을 찾기 위해 보다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영화관이 서서히 밝아졌을 때의 첫 느낌은 임파스토 기법으로 그려진 한 편의 유화 작품을 관람한 느낌이었다. 임파스토 기법이란 유화의 대표적인 기법으로 물감을 의도적으로 두껍게 칠해 생생한 붓 자국과 물감의 물성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임파스토 기법으로 두껍게 덧칠된 유화 작품처럼 영화 '우상'은 수많은 이미지와 의미들이 스크린 위에 뒤엉키며 덧칠된 작품이었다. 이러한 뒤엉킴과 덧칠로 인해 명확하게 영화를 바라보지 못했기에 더욱 여운이 남았고 천천히 영화를 곱씹어 보게 만들었다.


쉽게 와 닿지 않는 뒤엉킴에 '불친절함'을 느낀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간혹 알아듣기 힘든 대사로 인해 스토리를 놓치는 순간 급류에 휩쓸려 방향을 모른 채 흘러가는 카약처럼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도 지배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참으로 불친절하기에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겐 이러한 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아리송한 영화여서 그런지 조금만 검색을 해보아도 영화에 관한 아주 자세한 해석이 담겨있는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글은 영화가 품고 있는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한 영화가 주는 의미와 메시지에 관한 글을 써보았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이다' - 존 F 케네디


구명회라는 인물에게 가장 어울리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구명회라는 인물이 자신의 추악한 진실을 덮을 수 있었던 것은 거짓이 아니라 스토리로 이룩한 신화이기 때문이다. 우상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신'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우상의 사전적인 정의가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으로 알 수 있듯이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을 뜻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영화 마지막 부분 구명회가 연설을 하며 박수를 받는 장면을 통해 시각적으로 묘사가 되었다. 


구명회는 결말에서 자신의 추악함으로 인해 발생한 과거와 얼굴의 흉터를 '신화'로 각색해 대중들에게 역경을 극복한 아이콘이자 '우상'으로 살아남는다. 영화를 이끌어 가던 구명회, 중식, 련화 중 살아남은 건 구명회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이다.


한 때 누군가의 우상이 었던 인물들

 

과거에 비해 대중매체가 발전되면서 '가의 우상'이 되기란 쉬워졌다. 10대들의 우상인 '아이돌'들부터 구명회와 같이 성공 또는 역경을 극복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우리는 그들의 본모습이 아닌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우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몇몇의 우상들은 억지로 꿰맨 추악한 진실이 뿜어져 나오면서 몰락을 하게 되고 우상을 잃은 대중들은 사회에 대한 불신과 실의에 빠진다. 이 같은 우상의 몰락은 우상이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닌 대중에 의해서 '만들어 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우상'이라는 단어는 구명회에게만 의미가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 중식과 련화가 누군가의 우상이 되거나, 자신들의 우상을 찾았거나, 찾으려는 과정 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식과 련화의 삶이 우상조차 가지지 못하는 삶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중식과 련화를 포함한 구명회 이외의 캐릭터들 모두 구명회의 '우상화'를 위하 도구였다고 생각이 된다. 그들은 그저 철저히 구명회가 써 내려간 스토리의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강렬했던 이미지: 나뭇잎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강렬했던 이미지는 바로 '나뭇잎'이었다. 중식의 아들인 부남은 나뭇잎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련화와 머물렀던 호텔방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나뭇잎들, 사라진 부남을 찾기 위해 낙엽들이 모여있는 배수로를 찾아봤다는 련화의 말 등을 통해 부남에게 나뭇잎은 매우 특별한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나뭇잎은 부남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고 죽은 부남을 대신해 영화 곳곳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구명회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차를 씻었던 차고지의 배수구는 나뭇잎들로 막혀있었다. 그리고 구명회는 부남의 억울한 죽음이 스며들어 있는 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무심하게 나뭇잎으로 막힌 배수구를 뚫는다. 핏물과 나뭇잎이 천천히 소용돌이치면서 빨려 들어가는 장면과 물이 서서히 빠지면서 부남을 덮고 있던 비닐이 천천히 벗겨지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바닥을 뒤덮은 마른 나뭇잎은 사회적 약자들을 대변


배수구를 막은 나뭇잎들은 부남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악이 구명회란 권력에 의해 손쉽게 씻겨져 내려가는 장면을 통해 권력 앞에서 무기력한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구명회가 부남에 관한 정보들을 중식의 집에서 몰래 빼나 가는 장면에서도 나뭇잎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로 중식과 눈을 마주친 구명회가 뒷걸음질을 하면서 나뭇잎을 밟는 장면에서이다. 바스락 거리며 부서지는 나뭇잎, 복수심에 가득 찬 중식의 매서운 눈빛, 그리고 이런 중식을 바라보는 구명회의 표정이 어우러지면서 죽은 부남의 존재감과 더불어 중식과 구명회 사이에 몰아칠 태풍을 예견하는 태풍전야와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영화 초반을 이끌어 가던 부남의 죽음은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낙엽이 짓밟혀 바스러지듯이 우리의 관심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하지만 부남의 죽음이 잊히지 않기 위해 나뭇잎들은 사소하지만 인상적인 존재감을 보인다. 예를 들어 구명회 차의 바퀴에 붙어있는 나뭇잎을 클로즈업하는 것을 통해 부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구명회는 영원히 벗어 날 수 없는 것을 암시하듯이 말이다.



"안 보면 핏줄도 그냥 남이더라"


구명회 엄마의 대사이다. 안마 의자에 앉아서 퉁명스럽게 던진 이 대사는 가족과 혈육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아들의 철없는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에 큰 위기를 맞은 구명회에게 아들의 자수가 진정으로 아들을 위해 선택인 건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대사이다.


이 같은 의문을 뒷받침하듯이 아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문을 조용히 닫는 선택을 하는 장면을 통해 구명회에게 있어서 자신의 앞길을 막는 아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닌 하나의 장애물로 보는 시선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구명회에게 아들의 죽음은 모든 것을 영원한 침묵 속에 묻어버릴 최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생명이 위태로운 아들을 바라보며 병실 문을 닫는 구명회


이러한 구명회는 실존주의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속 그레고리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소설 '변신'은 가정의 경제력을 책임지던 그레고리가 어느 날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리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초반에는 가족이 그레고리를 보살피지만 결국 후반부에는 그레고리의 아버지가 던진 사과로 인해 부상을 입은 그레고리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의 죽음 후에 가족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변신'


구명회와 정반대인 인물이 바로 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식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형적인 부성애로 똘똘 뭉친 아버지이다. 이러한 자신의 순수한 의도가 헐뜯기지 않기 위해 구명회 가족과의 합의를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진심을 다한다.



이와 더불어 중식은 자신의 핏줄이 될 두 명의 사람까지도 지키려고 한다. 바로 부남의 아내인 련화와 련화가 임신한 아이이다. 정관수술을 한 부남이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중식은 련화가 임신한 아이가 부남의 아이가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련화가 임신한 아이는 중식의 아이일 확률이 매우 높다.  련화와 련화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는 중식의 모습과 련화를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 자신과 혼인신고를 하는 모습은 중식과 련화와의 관계가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련화가 결국 아이를 사산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순신 동상을 파괴하는 행위를 벌인 것도 련화의 아이가 중식의 아이임을 알 수 있는 단서라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제일 큰 인물의 목을 따래요"


영화 초반에 나오는 목이 잘린 이순신 동상은 충격적이다. 조선을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은 '해신'이라고 불리며 단순한 위인 이상의 존재, 즉 국민의 '우상'이기에 충격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중식의 머릿속을 맴돌던 무당의 말은 결국 구명회의 이름이 적힌 선거운동복을 입고 이순신 동상의 목을 처버 리는 결말을 이끌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구명회의 목을 칠 수 없는 것을 중식은 알기에 구명회 보다 '더 큰 인물의 목'을 치는 것을 통해 구명회의 목까지 친다.



이순신 동상의 목이 파손된 것의 충격은 아마 숭례문 화재 때와 맞먹을 것이다. 아직도 불에 타오르는 숭례문을 담은 뉴스가 생생할 정도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영원히 기록될 불명예라 할 수 있다. 


중식이 수백 명의 죽음보다 이순신 동상의 파손에 국민들이 더욱 분노한다는 대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상징과 우상에 얽매여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순신 동상은 이순신 그 자체가 아니지만 이순신 동상의 파손이 국민에게는 중식이 살아있는 이순신의 목을 친 행위와 동일하게 생각했기에 분노한 것이다. 




감상평


영화 평론가가 아닌 영화를 좋아하는 한 명의 관객의 시점으로 써 내려간 이번 글은 영화에 사용된 기법이나 배우들의 연기 등을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것이 아닌 내가 순수하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반으로 완성하였다. 그렇기에 매우 주관적인 의견과 해석들이 주를 이뤘을 것이다.


영화 '우상'은 감독이 하고 싶어 하는 모든 얘기는 다 담았다고 생각한다. 권력층의 부패,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우상들의 민낯, 불법체류자 문제 등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을 스크린 위에 덧칠해 놓았다.  이러한 감독의 문제의식은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를 통해 증폭이 되었고, 우리의 머릿속과 가슴을 울렸다. 압도당한 한 명의 관객이었던 나의 귓속에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아그누스 데이'가 울려 퍼졌다.


다소 아쉬운 점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연출된 몇몇 장면들에 대한 거부감과 불분명한 발음으로 인해 몰입이 방해되었던 점이다.


글을 쓰는 와중에도 '우상'이라는 단어는 역시나 지배적인 단어였다. 

각자의 우상은 누구일까? 우리가 품고 있는 저마다의 우상은 결국 신기루 아닐까? 나도 누군가의 우상이 될 수 있을까? 우상조차 가질 수 없는 삶이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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