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나도 흘러내린다'

비를 맞으며 들은 음악

by 하잎

장마가 시작되었다. 세찬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린다.


툭툭 창문을 두둘 기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집안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지금이 요즘 말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구나 싶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일그러지며 흘러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면 온 세상을 다 씻어버릴 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조차 하나의 작품이다. 빗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려 투명한 줄무늬를 새기고 희미하게 비치는 나의 모습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를 싫어했다. 비가 내리면 놀러 가기도 불편하고 가뜩이나 가기 싫은 학원을 갈 때 나를 더욱 괴롭혔다. 한창 배드민턴에 푹 빠져있었을 때는 배드민턴을 실외에서 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비가 영영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비는 바라볼 때만 좋은 거지 맞을 때는 전혀 좋지 않았다. 적어도 어렸을 때의 나는 비가 싫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무뎌지는 건지 아니면 예민해지는 건지 비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변화 하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으면 가끔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온전한 내가 된 것 같았다. 우산을 씀으로 생기는 암묵적인 나의 구역은 빗방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다. 우산끼리 부딪힐지 망정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산 아래에서 나는 진정한 혼자였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우산을 함께 쓰면 더더욱 우산 아래에선 함께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연인은 우산 아래에서 좀 더 가까워져야 하고 그 순간만큼은 세차게 지나가는 버스,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도 둘밖에 없는 낭만적인 기분을 느낄 수가 있다. 비가 세차게 내리면 내릴수록 그들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이처럼 마냥 부정적이었던 비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나에게 점점 긍정적인 존재로 바뀌어 갔다.


https://youtu.be/LeuqDGZVvr0

Rad Museum - Dancing In The Rain


비가 오기를 기다려 연인과 함께 빗속에서 춤을 춘다는 가사가 참으로 낭만적이다. 도입부부터 나오는 잔잔한 기타 리프와 라드 뮤지엄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어우러져 한층 곡의 분위기를 살렸다. 두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아랑곳하지 않는 미소를 띤 연인이 서로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장면이 생각나다.


푸른 담장을 넘어
하늘 위로 Jump
날개를 피고 Turn
빗물이 튀기든 말든
We just dancing in the rain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빗물이 튀기든 말든, 비가 퍼부어 눈조차 뜨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춤을 춘다는, 다소 현실이었다면 이상한 눈초리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한 가사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우산 아래가 자신들만의 공간이듯이 춤을 추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그들만의 세계다. 무심하게 내리는 비조차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 앉아서 비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군대 후임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저녁 6시까지 강남역 10번 출구로 가야만 한다. 다행히 세차게 내리던 비는 잠시 잠잠해졌고 눅눅해진 공기를 머금은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비에 젖었을 때의 찝찝한 느낌이 싫어 불편한 워커를 신고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소지품을 담은 비닐백을 들고 비를 맞으러 나갔다.


비가 올 때마다 듣는 장르가 있다. 바로 Lo-Fi 장르와 Trip Hop 장르이다. 이 두 장르가 뿜어내는 특유의 잔잔하고 우울한 바이브는 빗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 같다. 둔탁한 질감의 드럼, 의도적으로 섞은 잡음과 슬픔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주는 분위기는 이어폰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빗소리와 어우러지며 나를 주룩주룩 흘러내리게 만든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비를 튕겨내면 달려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보았다. 도로가 젖어있어서 그런지 자동차 타이어가 지면과 닿으면서 내는 소리가 좀 더 진하게 들렸고 타이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빗방울들이 쉴 틈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울적했다. 어느새 버스가 도착을 했고 재빠르게 올라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눅눅했던 내 마음까지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주었다.


https://youtu.be/3h-JYx76 QNM

Massive Attack - Teardrop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들었다. Tip Hop 장르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Massive Attack의 곡이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의 충격 때문에 비가 오면 자주 이 곡을 듣는다. 방 한가운데에서 나에게 차갑고 냉정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이 곡은 오죽하면 진짜 우울할 때는 절대 듣지 않는 곡이다. 그 정도로 나의 감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곡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목적지 없이 멀리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이 곡이 주는 특유의 차갑고 냉정한 느낌 때문인지 내가 타고 있는 버스의 목적지는 강남역이지만 마치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어디론가는 가야만 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생각하기보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에 굴절된 자동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철없는 주인공이다.


요즘 나의 고민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던져진 나에게 세상은 계속해서 목적을 찾으라고 주문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떠난다. 목적을 찾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떠난다'라고 표현을 했다. 애초 목적지가 있었다면 그건 떠나는 것이 아닌 버스를 타고 강남역을 가듯이 단순히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버스는 언젠가는 강남역에 도착할 것이고 나는 하차하기 위해 벨을 누를 것이다. 언젠가 인생의 목적을 찾아 막연한 여정을 멈추기 위한 벨을 누를 수 있기를 바란다.




강남역이라 그런지 비가 와도 사람들은 넘쳐났다. 모두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 각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하늘은 흐렸지만 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사람들의 옷차림은 화려했고 수많은 우산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10번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전역 후 처음으로 만나는 후임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얘기해도 시간은 부족했다. 나랑 2주밖에 차이 나지 않았던 맞후임이었기 때문에 가장 많은 추억을 나눈 후임이었다. 이러니 하루 종일을 써도 부족할 판에 저녁 6시에 만나서 얘기하기에는 다가오는 막차 시간이 참으로 야속했다. 뭐 그래도 영원한 이별은 아니니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지만 헤어졌다.


집에 올 때는 지하철을 이용했다. 술을 마셔서 알딸딸한 상황에서 자칫 버스에서 잠이라도 잔다면 번거로운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비를 맞으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몽롱하면서 허무한 이 감정을 좀 더 증폭시킬 수 있는 곡을 찾아보았다. 이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후임과 나누며 마셨던 술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나를 더욱더 흘러내리게 만들 수 있는 곡, 그런 곡이 필요했다.


https://youtu.be/0 kEISffAVpI

Niia - California (feat. Boogie)


덜컹거리는 지하철 소리를 뚫고 Niia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나의 취기를 어루만져 주었다. 오래된 LP판에서 흘러나올 듯한 느낌의 이 곡은 방 안에 불을 다 끄고 침대에 누워 자주 듣는 곡이다. 차분하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Niia의 목소리가 깜깜한 방안에 울려 퍼질 때 흐릿하게 기억나는 꿈속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기분이 든다.


이 곡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을 환승하지 않고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남는 게 시간이고 적당히 내리는 비와 알맞은 취기를 좀 더 즐겨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집으로 가는 길엔 아무도 없었다. 자동차들만 내 옆을 쌩쌩 지나갈 뿐 앞과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비를 맞으며 중얼중얼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노래가 점점 커질수록 우산에 부딪혀서 흘러내리는 빗방울처럼 나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무지개를 보려면 비를 참고 견뎌야 한다.
- 돌리 파튼(Dolly Parton)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언제까지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매일이 흐릴 것이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로 항상 맑을 수는 없다. 슬픔과 우울은 찾아오게 되어있고 상황이 안 좋으면 장마처럼 길게 갈 수도 있다.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게 퍼붓는 비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비가 내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허둥지둥 우산을 펼치고 비를 피하는 것이다.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외면하고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조금이라도 내 가슴을 슬픔과 우울에 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집안에서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듯이 이러한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있다면 돌리 파튼의 말처럼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참고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비를 맞으며 들은 다른 음악>

2xxx! - Dawn (feat. Rad Museum & Punchnello)

OFFONOFF - Cigarette (Feat. Tablo & MISO)

검정치마 - 나랑 아니면

검정치마 - Everything

에픽하이 - 빈차

XXXTENTACION - Jocelyn Flores

XXXTENTACION - Everybody Dies In Their Nightmares

Niia - Hurt You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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