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천연색으로 물든 앨범
'차일디쉬 감비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다재다능이다.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재능을 펼치며 자신의 삶을 화려하게 색칠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차일디쉬 감비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풍부한 음악적 영감을 하나로 모아 전작보다 호평을 받는 앨범을 완성했다.
2018년 'This is America'라는 기념비적인 트랙으로 미국 사회를 고발하며 진정한 아티스트의 자세를 보여준 차일디쉬 감비노. 이번 앨범은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근원적인 질문들을 충돌과 좌절의 감정을 담아 하나의 순간으로 짓누른 사운드로 채웠다.
오랜만에 귀가 즐거웠지는 앨범이었다. 현재 힙합차트는 자기 복제 성격을 보이는 진부한 트랙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음악시장에 적잖이 실망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차일디쉬 감비노의 새로운 앨범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구조적이고 짓이겨지는 사운드, 잡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분출되는 사운드, 오토튠 등 불규칙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형화되지 않은 신선함은 리스너와 평단의 귀를 사로잡기 충분했다. 이외에도 펑크와 알앤비를 섞은 듯한 트랙, 아프리카의 색깔을 담고 있는 리듬, 소울풀하면서 대중성까지 잡은 트랙 등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을 모두 담은 앨범이다.
앨범커버부터 트랙의 이름까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며 순수히 가사, 비트, 플로우에만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 그의 앨범은 평소 그의 철학과 맞물려 더욱 빛을 발했다.
차일디쉬 감비노의 앨범들은 사운드적인 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백미는 바로 가사다.
이번 앨범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트랙은 바로 2번 트랙인 'Algorhythm'이다. 삶과 인간에 대한 질문, 실존주의 철학의 색깔이 묻어나는 가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Humans don't understand, humans gon' sell a lie
인간은 이해 못 해, 인간은 거짓을 팔게 될 거야
Humans gotta survive, we know we gon' die
인간은 살아남을 거야, 우린 다 죽을 거란 걸 알아
Nothing can live forever, you know we gon' try
어떤 것도 영원히 살 순 없어, 우린 그렇게 하려 노력할 거란 걸 알겠지만
Life, is it really worth it? The algorhythm is perfect, mmh
삶, 그게 진짜 가치 있는 것일까? 완벽한 Algorhythm(알고리즘)이다.
실존주의는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구체적인 모습에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사상운동을 뜻한다. 대표적인 철학자, 작가는 '니체',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프란츠 카프카'가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인간 주체의 삶이 상식으로 통하고 있다. 과거 신의 존재 증명이나 세계의 전체상 해명이 유행한 19세기가 아닌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의 속박에서 해방돼 이성의 우위를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시대이다. 자연스럽게 인간과 삶의 현실적인 의미를 고민하는 '실존주의'가 꽃피우게 되었다.
2번 트랙 Algorhythm은 '삶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야 우리의 삶은 그저 하나의 알고리즘처럼 짜인 것뿐이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사는 삶에 대한 허무함과 삶은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기인해 접근했다. 하나의 짜인 프로그램 안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허무주의, 우리의 삶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꿀 수는 없다는 회의론적인 가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이런 허무주의와 회의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개개인의 삶이 모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더욱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Looking for something worth it, the algorhythm is perfect, mmh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찾으며, 완벽한 Algorhythm)'
이어지는 3번째 트랙 'Time'에서도 희망을 찾기 힘든 가사가 이어진다. 불길한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트랙으로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간이 다해간다는 반복적인 읊조림으로 우리는 모두 살아가는 게 아닌 죽어가는 중이라는 비관적인 감정 또한 내포하고 있다.
2018 7월에 발매했었고 또한, 앨범에서 가장 대중적인 10번째 트랙 '42.26(Feels Like Summer)'의 가사도 여유와 활력을 잃어가는 세상에 변화가 필요하지만, 변화는 오고 있지 않다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청량감이 넘치는 비트와 적절한 오토튠의 사용으로 해변이 저절로 연상이 되는 노래이다. 단순히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로 오인하기 쉬운 멜로디로 이어진 트랙이었기에 더욱 가사가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지막 트랙인 '53.49'는 앞선 트랙들과는 다르게 낙관적이고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모든 순간에 사랑이 담겨있다고 노래하며 앨범 전반을 지배하던 회의적인 감정이 아닌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사랑을 제시해주며 절망이 아닌 희망적인 어조로 앨범의 끝을 마무리했다.
There is love in every moment
모든 순간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Under the sun, boy
이 하늘 아래에서는
You do what you wanna do
너도 하고 싶은 걸 하며 살렴
귀를 즐겁게 한 트랙은 7번째 트랙인 32.22이다. 공기를 짓이겨버리는 듯한 베이스와 잡음,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도구로 사용해 고조되는 긴장감과 더불어 하나의 의식을 치르는 듯한 장면을 표현한 트랙이다. 아프리카가 생각나는 리듬과 독특한 오토튠을 사용해 언어가 발달하기 전의 원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외에도 생각보다 충격적인 가사를 가진 9번째 트랙인 39.28, 42.26과 더불어 대중성을 겸비한 5번째 트랙인 19.10 등 몇몇 트랙을 추천하기에는 모든 곡들이 각자의 색과 향기를 가지고 있다.
앨범 3.15.20은 각각 나누어진 트랙들이 뭉쳐 하나의 작품임을 보여주기 위해 대부분의 트랙들의 제목을 시간으로 표시했다고 생각한다.
차일디쉬 감비노는 무채색의 재료를 가지고 총천연색의 작품을 들려주는, 상식을 벗어난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틀림과 다름, 천재와 광기의 사이에 놓인 미지의 공간을 우리에게 들려줬으며 리스너들로 하여금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를 찾게 끔 이끌어준다.
차일디쉬 감비노의 음악은 예상하지 못한다.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신선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