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조울 Aug 17. 2024

비행기에서

감정 바라보기

  혼자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이다. 


  탑승한 비행기에는 좌석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3석-4석-3석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나는 중간 4개의 자리 중 왼쪽에서 3번째 자리를 배정받았다. 왼쪽 창가에 가까운 3개의 자리에 부인과 어린 아들, 딸로 보이는 가족이 앉았고, 남편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중간 4개의 자리 중 왼쪽 1번째 자리, 즉 나의 옆, 옆 자리에 앉았다. 체크인이 늦었는지, 아니면 좌석 배정이 늦었는지 모르지만 어린 아이 둘을 동반한 일가족이 앉기엔 불편한 구조였다. 장시간 비행에 이제 갓 4~7살 쯤으로 보이는 아이 둘을 챙겨야할 부인이 고생할게 훤했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남자와 나 사이에는 좌석이 하나 남아 조금이나마 편하겠군, 생각했다. 


  창가에 앉은 부인은 남매 중 상대적으로 더 어린 아들을 본인 옆에 앉혔고, 엄마의 관심에서 밀린 어린 누나는 내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의 옆자리를 찾았다. 아이는 남자와 나 사이 비어있던 빈자리를, 그리고 엄마 대신 아빠의 관심을 차지했다. 

  7살쯤 된 아이였고, 예의바르고 얌전했으며, 곧 잠들어 버렸기에 아이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빈 자리의 여유가 아쉽긴 했어도. 그런데 나는 아이가 내 옆에 앉는 순간부터 속으로 몹시 짜증이 났다. 쌔근쌔근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거슬리고, 잠결에 아이의 손이 살짝만 내 옷깃을 스쳐도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아이 아빠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사과했지만 나는 내내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1시간 쯤 그렇게 불쾌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있는데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분노, 짜증이 의아해졌다. 태어나 처음 본 가족이며, 소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이가 부모 말을 듣지 않으며 어린 아이 답잖게 음흉하고 교활할 거라고, 남동생을 심하게 질투하고 이기적인 아이일 거라 단정짓고 못마땅해하고 있다. 왜?

  일단 짜증이 났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왜 짜증이 났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곰곰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빠 옆에 잠든 소녀의 모습에서 유년 시절 부모로부터, 특히 엄마로부터 원하는 관심을 받지 못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언니와 늦둥이 남동생을 둔 둘째딸이었고,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늘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외벌이에 주6일 근무를 하던 그 시절의 아버지는 엄마를 대신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외로웠다. 그리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할 때마다, 엄마는 본인은 나를 차별 대우한 적이 없으며, 내가 삼 남매 중 유난스럽고, 예민하다고 몰아붙였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이 한 마디 듣고 싶었을 뿐인데, 혹은 엄마의 관심이 필요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건 늘 날이 선 엄마의 비난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솟아오른 불쾌한 감정을, 유년 시전 나의 결핍을 처음 본 아이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단순한 투사가 아니라, 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너무 쉽게 얻는 듯한’ 아이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 때 나의 심리는 마치 혹독하게 시집살이를 겪은 시어머니가 본인이 시어머니가 되면 애꿎은 며느리를 괴롭히는 심리와 비슷하다. 

  '나는 그때 그렇게 힘들었는데 너는 왜 나만큼 힘들지 않는 거야. 억울해.'

  '네가 뭔데 그렇게 쉽게 원하는 걸 얻으려고 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힘들었던 시절은 이미 보상받을 수 없는데 타인이 비슷한 상황에서 나와 똑같이, 혹은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프지 않는다는게 화가 나는 것이다. 외로움, 괴로움, 분노, 그리고 질투의 괴이한 전치.

  

  한참을 그렇게 침묵 속에 앉아있었다.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고 짜증이 난 이유를 깨닫고 나니까, 인정하고 나니까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신기했다. 딱히 마음 속 어린 아이를 보듬어 준 것도 아니었는데. 

  충분히 진정되었다고 느낄 때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냥 어린 아이였다,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저 우연하게 비행기의 옆자리에 앉았을 뿐이다. 상황을 깨닫고 나니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났다. 


  빈 자리의 여유가 아쉽긴 했지만 애초 내가 느꼈을 감정도 딱 그만큼 뿐이라 이내 털어버리고 잠을 청했다. 아이의 체온도, 숨결도 신기할 정도로 의식할 수 없게 되었다. 한숨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활주로에 착륙 중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 사회가 정신질환에 미치는 영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