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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혜연 Jul 18. 2022

여행의 시작

오래된 이야기

 어려서부터 나는 특징이 없었다.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는 뭘해도 중간.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없는 무미건조한 상태. 대학입시 때도 나는 이과생이 쓸 수 있는 모든 학과에 지원했다. 간호학과부터 항해학과까지. 하나도 겹치지 않는 각기 다른 전공으로 6개의 원서를 썼고, 안타깝게도 모두 합격했다.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게 편한 나에겐 선택권이 주어지는 건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오랜 고민에도 여전히 선택지는 좁혀지지 않았고, 끝내 내 전공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지원한 전공’이란 이유로 에너지 공학으로 정해졌다. 그럴 거면 왜 대학을 갔나, 싶겠지만 당시엔 남들이 다 가니까 나도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인 줄로 알았다. 대다수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이유를 묻지 않는 사회가 아닌가. 결혼을 하는 사람에게 왜 하냐고 묻지 않지만,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되려 왜 ‘안’하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당시 대학 입학이 그랬다. 그래서 나도 남들 따라 대학을 갔고, 아무도 나에게 ‘왜 대학을 가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수동적이어서 한심하기까지 한 삶이었지만, 나는 선택과 자유가 제한된 미성년자였기 때문이었으리라 합리화하며, 20대엔 능동적인 멋진 어른이 되어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반복되는 날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불안감에 쫓기면서 꿈을 묻는 질문에 억지로 그럴듯한 대답을 찾아내기 바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나이 20살. 사람들은 ‘꿈’을 청춘만의 특권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꿈’이 있어야 하는 건 청춘의 의무인 것처럼 되어있었다.

 그래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들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뤘으며, 다양한 삶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게 준 공통적인 조언은 2가지였다. “책 읽어라”, “여행해라”. 첫 번째는 수행하기 쉬웠지만, 두 번째 조언은 평생 이루지 못할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젊을 때 꼭 여행하란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마음 한편에 여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일었다. 그건 내 생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게 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12시간만에 도착한 곳은 프랑스 파리. 사람도, 언어도, 냄새도, 색깔도 모두 달랐다. 몸에 닿는 공기가 낯설었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마법 세계에 온 듯했다. 가장 놀랐던 건 “무장군인”이었다. 자유를 상징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휴전국에서도 본 적 없는 무장군인을 공항에 내리자마자 보게 될 줄이야. 사람이 총을 들고 있는 걸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마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다음으로 놀랐던 건 “흑인”이었다. 단일민족국가에서 살아온 나는 “유럽은 백인국가, 아프리카는 흑인 국가”라는 관념이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유럽에 흑인이,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백인이 그렇게나 많을 줄은 전혀 몰랐다. 파리에 도착하기 몇 달 전부터, 시중에 출판된 여행서적과 블로그,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뮤지컬, 고전작가들의 소설까지 다 섭렵하고, 파리 관광지도를 외울 정도로 공부했는데, 이런 당연한 것들에도 무지했다. 알고 있었더라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때의 느낌은 분명 새로웠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감정이 이 정도였으니, 48일간의 첫 해외여행은 매일 하루를 책 한 권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매 순간이 신선했다. (그렇다고 48권의 책을 쓸 순 없으니 유럽 여행기는 어쩔 수 없이 생략해야겠다.)

 48일간의 유럽여행은 순식간에 끝났고, 본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꿈을 찾겠단 명목으로 여행을 떠났고 여행만 다녀오면 뭐라도 더 선명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여행 후 내 일상은 더 흐트러졌다. 에펠탑 아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자유를 느끼던 나와 불안감에 쫓겨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 앉아있는 나 사이의 괴리를 견딜 수 없었다.

  더 이상 일상에서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고, 마음은 온통 여행에만 쏠려있었다. 여행은 분명 힘들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남미 여행을 계획했다. 지난 48일의 여행이 심하게 아쉬웠던 터라 이번엔 아예 휴학을 하고 다녀올 참이었다. 여행지는 더 멀어지고, 여행일 수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노동(돈)이 필요했다. 여행경비를 모우기 위해 하루 24시간 주 7일을 가득 채워 사용했다. 평일 오후엔 학원알바를 하기 위해 주 5일 오전에만 21학점을 채워 들었다. 이동시간을 아끼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전봇대에 직접 과외 전단지를 붙여 과외를 구했고, 주 2회 2팀 과외를 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학교와 집 딱 가운데 있는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딱 하루 일정이 비는 일요일엔 국내 당일치기 여행 가이드로 풀타임 일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골병이 안 든 게 더 신기할 정도다.

 그렇게 나는 여행경비를 마련했고, 다음 학기엔 휴학을 하고 여행을 가겠다고 부모님께 통보했다. 엄마 친구 아들들이 한참 취업준비니 공무원 시험이니 실물적인 목표를 향해가고 있을 때, 본인의 딸은 휴학까지 하고 고작 여행 따위를 한다는 걸 못마땅해하셨다. “네가 지금 그럴 때냐?”로 시작한 공격을, 어디서 주워들은 여행 명언들을 읊으며 방어했다. 그랬더니 결국 가장 현실적인 문제로 나를 쏘아붙였다. “네가 지금 ‘우리 집 형편’에 그럴 때냐?”

 전교생이 100명쯤 되는 시골학교긴 해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여동생이 고3이었다. 부모님은 동생이 서울권 대학에 가기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론 돈 때문에 겁먹고 있었다. 동생은 언제나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적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전교 1등 하는 동생에게까지 나처럼 기숙사비나 자취 비용이 들지 않게 집 가까운 대학으로 입학하라고는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빨리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돼주길 기대했던 큰 딸이 여행을 가겠다니. 틀린 말도 아니고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떤지는 한평생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 아니 서울 구경도 못해본 부모님은 내게 많은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남미 여행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몰라주는 부모님에게 서운한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은 ‘정신 차리라’는 말로 나를 몰아붙였고, 그 바람에 나는 정신이 확 들었다. 어쨌든 내 인생이지, 부모의 인생이 아니지 않은가. 이 무렵 나는 처음으로 부모를 ‘엄마’, ’ 아빠’가 아닌, ‘그냥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을 보며, 나중에 부모가 된다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게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에도 도전하는 법을 가르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진짜 독립을 해야겠다고도 다짐했다. 여행 후로 크게 달라진 가치관과 삶의 방향성에 대해 늘 ‘부모님이 싫어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뒤따라왔다. 유럽에서도 종종 당시 최대 고민이었던 이 문제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주의 문화가 강했던 서구권에서 내 고민은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애송이나 하는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극단적으로 다른 ‘가족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당시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건 후자였다.

 그렇게 나는 휴학 신청을 했고, 남미로 떠났다. 여행지를 ‘남미’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에서 가장 멀기 때문이었다. 여행이라는 기회가 이토록 소중하다 보니, 이번에도 정말 내 인생의 다신 없을 마지막 여행일 줄알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가기 힘든 곳으로 정한 것이다. 사실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원래 여행이란 어디로 가는지보다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난 그저 이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 뭐든 다시 내게 새로운 영감을 느끼게 해 줄 곳이 필요했다.

 48일의 여행과 220일의 여행은 분명 달랐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욕심이 많았던 탓일까. 그렇게 힘들게 왔는데  여행은 완전히 망했다. 힘들게  돈인 만큼, 돈이 너무 아까웠다. 물욕이 커진 만큼 식탐도 커졌다.  번은 조금 부담스러운 금액의 뷔페를 갔다가 뽕을 뽑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혼자 2시간 동안 피자 한판에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2 접시나 먹고, 과일과 디저트까지 종류별로  먹고 왔다. 아마  몸무게의 10% 족히 넘는 무게의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다 폭식증까지 생겼다. 누가 밥이라도 사주면 이때다 싶어 닥치는 대로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너무 많은 관심과 호의를 받아서였을까, 어느 순간 호의가 권리인  알고는  마저도 계산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나눌  있는  없었다. 나는 그들을 이용할 뿐이었다. 이런  모습이 쪽팔려서 이때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과는 연락도  한다. 아마 그들도 나한테 연락하기 싫을 거다. 여행을 위해 돈을 벌었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여행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었는데, 마치 돈을 아끼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은  이상 즐겁지 않았다. 엄마 말대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조급해졌다. 남들보다 220  뒤쳐진 느낌이다. 한국에 있었을  온통 여행 생각으로만 가득했는데, 막상 여행을 하고 있으니 여행에 집중하지 못했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졌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귀찮기만 했다.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외로웠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다. 비싼 물가로 악명 높은 파타고니아에 있을 때였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같았다. 투어들은 어찌나 비싼지, 투어를 하고 싶은 마음과 돈을 아끼고 싶은 마음이 매번 충돌하면서 나를 괴롭혔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땅에서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결국 나는 많은 투어를 포기했다. 특히  시간에 30  하는 모레노 빙하 트레킹 투어를 포기했을 때는 정말 속상했다. 빨리 파타고니아를 떠나고 싶었다급하게  칼라파테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는 30 원짜리 비행기를 티켓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를 놓쳤다. 아르헨티나 항공으로 티켓을 구매하려다가 뒤늦게 라탐 항공이 3   싸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르헨티나 항공을 취소하고 라탐으로 예약을 했는데, 그전에 와있던 아르헨티나 결제 요청 메일을 항공권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3  아껴보려다 30 원이 날아갔다.  돈이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빙하투어를   있었는데, 나는 빙하 투어도 못하고 항공권도 날려버렸다. 칼라파테의 공항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지나가는 차도 한대 없다. 공항 직원들도 6시면  퇴근했다.  비어버린 공항에서 나는 그대로 밤을 새웠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완벽한 조건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처음부터 하나하나  문제들을 짚어나갔다. 문제들을 따라가다 보니, 비행기를 놓친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날 , 오랜만에 엄마랑 통화도 했다. 여행 중에 걸려오는 엄마 전화가 귀찮아서 시차 핑계를 대며 피하기 바빴는데, 아마 처음으로 내가 먼저   같다.  상황 설명을 들은 엄마가 말했다. ‘혜연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없으면 엄마가 줄게.’  말이 너무 따뜻했다.  혼자 열심히 엄마를 미워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애다. 세상 내가 제일 잘난  알고 기고만장했던 나를 엄마는  이렇게 무너뜨린다. 그래도 엄마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원래 하려고 했던 빙하투어를 포기했으니, 빙하투어 했다 치고  돈으로 다시 항공권을 구매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다음날 공항에서 부에노스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편을 구매했다. 하지만,  한국 카드가 먹히지 않아 여행자 단톡방에 도움을 구했다.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카드가 먹히지 않을 경우 해결책이 있는지 물어본 거였는데, 부에노스에 살고 있던 교민분이 얼     없는  항공권을 대신 구매해주셨다. (후에 한국계좌로 이체해드렸다) 부에노스 공항으로 마중도 나와주시고 일주일 동안 먹이고 재워주셨다. 결국 나는  집에서 울었다. 회개의 눈물이었다.  칼라파테 공항에서 밤을 지새웠던 그날이 220 남미 여행  가장 많은 영감을  날이었다. 단언컨대 날려버린 30 원짜리 항공권이 빙하투어보다 훨씬  값진 경험이었다. 여행을 한다고 당나귀가 말이 되어 돌아오진 않는다. 그저 당나귀가 자신이 당나귀임을 깨닫고 올뿐이다. 하지만 당나귀가 자신이 당나귀임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할  있었다. 여행이 아니었음,   없었단  모습이었다. 비록  모습이 생각만큼 멋지지 않을지라도, 너무 별로라서 매우 실망스러울지라도, 그건 나였다.


 추신 : 놀랍게도 나는 바로 그다음 해에 결국 빙하투어를 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여행사 사장님에게 고용되어 그다음 해에 남미투어를 인솔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올 일 없을 줄 알았던 남미를 그 후년에도 그 후년에도 계속 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도 남미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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