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콜롬비아의 반미 열풍

파블로의 흔적을 따라간 메데진 여행

by 욘다혜욘

메데진의 역사는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메데진은 파블로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자 그가 가장 사랑한 도시였다. 파블로가 인생 대부분을 보낸 곳인 만큼, 여전히 그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파블로는 메데진에만 170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들 중 다수가 지하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다. 파블로가 수배 중에도 지하터널을 통해 메데진 전역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던 이유다. 포브라도 지역에는 그가 거주했던 집들 중 하나가 ‘파블로 에스코바르 박물관’으로 개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그가 실제로 사용했던 (책장으로 위장한) 비밀문과 (지금은 막힌) 비밀통로의 입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파블로 박물관에 전시된 파블로의 차

미국 코카인 유통의 80% 이상, 전 세계 마약 유통의 35% 이상을 차지했던 파블로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콜롬비아에서 최초로 포르셰를 수입한 것도 파블로였으며, 그는 스포츠카를 즐기기 위해 국도사업에 자금을 대기도 했다. 또한 미대륙과 유럽을 통틀어 그가 가진 전세기는 콜롬비아 내 모든 항공사가 가진 항공기보다도 많았다. 마라도나와 같은 세계적인 축구선수들이 파블로만을 위해 경기를 했고, 메데진 국가대표팀 아틀레티코를 운영한 것도 파블로였다. 제임스 본드의 영화를 인상 깊게 보고서는 영화에 사용된 요트를 구매한 것은 물론, 스포츠카, 헬리콥터, 보트 등 수많은 모빌리티를 소유했다. 당시 파블로는 연간 220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세계 7대 부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그는 ‘마약상’이 아닌 ‘사업가’로만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호화로운 날들을 이어가던 파블로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가 정치에 개입하면서부터였다. 그로 인해 그가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밝혀지게 되었으며, 콜롬비아 내에서도 수많은 적이 생겼고 미국에게도 제대로 찍혔다. 그가 재배하고 가공한 마약 대부분이 미국으로 수출되었으니 미국에서는 파블로를 그냥 둘 수 없었다.

알래스카부터 파나고니아까지 이어지는 판 아메리카 고속도로

파블로가 주로 마약을 재배했던 지역은 콜롬비아와 파나마 사이 정글지대였다. 이곳은 파블로 시대에는 통행 가능했지만, 현재는 완전히 막혀있다. 여기에 대해서 도적, 야생동물 보호, 등 여러 추측이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구간의 도로만 개통된다면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알래스카부터 파나고니아까지 ‘판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런 이점을 포기하면서까지 도로를 폐쇄해버린 데에는, 여전히 이곳에서 마약이 재배되고 있으며, 그 배후에 이제는 파블로가 아닌 미국이 있을 거란 추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미드 나르코스

비록 마약사업이긴 해도 외화벌이에 큰 공헌을 한 파블로지만, 대다수의 콜롬비아인들은 파블로를 극도로 싫어한다. ‘나르코스’가 방영된 이후 몇 년 동안은 파블로에 대한 혐오 감정과 함께 친미 열풍이 뜨거웠다. 나르코스에서 파블로는 대통령 후보를 죽이기 위해 민간인이 탑승하고 있던 비행기를 폭발시켜 버리는 사이코패스로 그려졌다. (물론 실화긴 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정부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쥔 파블로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그런 파블로를 죽인 건 미국 경찰이었다. 나르코스를 통해 콜롬비아인들은 “정의롭고 선량하지만 힘이 없는 우리의 대통령’을 대신해서 ‘정의롭고 선량하고 힘도 센 미국’이 ‘파렴치하고 잔인한 악당 파블로’를 죽여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낀다. 원래도 친미적이었던 콜롬비아는 나르코스 이후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을 찔렀다.

보고타에서 파블로를 체포하는데 공헌한 콜롬비아 전직 경찰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그 공헌을 인정받아 받은 표창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개중엔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에서 받은 것도 있었다. 당시 파블로는 미대륙뿐 아니라 세계적인 공공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파블로를 통해 콜롬비아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국제경찰로서의 입지를 제대로 다졌다. 그가 죽고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국 뽕에 대한 파블로의 기여도가 마블 영웅들보다 클 것이다.

파블로의 친형 리베르토

그가 죽고 난 후, 콜롬비아 정부는 그가 살아생전 축척한 막대한 부를 모두 압수했다. 콜롬비아에 남은 파블로의 가족들은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정도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파블로 박물관에서는 그의 조카 니콜라스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때 파블로의 집이었던 박물관 역시 현재는 국가 소속이며 그에겐 조금의 지분도 없다. 그는 이곳에서 ‘박물관 가이드’으로 일하며, 파블로를 주제로 한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구독자는 3000명쯤 된다.) 박물관 안에는 그가 어릴 적 마라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지만, 현재의 그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 막대한 부를 누렸는데 조금이라도 숨겨둔 돈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이들에게 남은 건 정말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때 파블로와 함께 공개수배를 당한 파블로의 친형인 로베르토도 메데진에서 50km 떨어진 과타페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과타페 호수의 섬들 중에는 과거 파블로의 소유였던 호화 별장이 있다. 다이빙을 하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수영장에 헬기를 띄어 점프대를 만든 사진으로 유명한 이 별장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사유지로 내부 관람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리베르토는 여전히 이 근처에서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파블로의 친형 리베르토 2

한 때 번영을 누렸던 파블로와 그의 가족들은 대부분 죽었고, 콜롬비아에 남은 일부는 ‘파블로의 가족’이라는 명함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들은 브라질에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아무도 모른다. 파블로는 도피 중에 가족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200만 달러를 불태운 일화가 있을 만큼 애처가이자 부성애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파블로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숨겨둔 돈은 있지 않을까 추측했지만, 콜롬비아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건 아닐 거라고 했다. 콜롬비아 정부가 얼마나 철저히 조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파블로의 조카 니콜라스

니콜라스에게 “정부가 원망스럽고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긴 게 억울하지 않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질문을 바꿨다. “파블로는 당신에게 좋은 삼촌이었습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는 좋은 삼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오 파블로 에스코바르 교회

파블로가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데진 빈민촌에서는 여전히 파블로를 마음 깊이 추모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은 ‘바리오 파블로 에스코바르’다. 이곳에는 파블로와 그의 어머니를 신처럼 모시는 작은 교회가 있다. 일명 ‘파블로 교회’로 불려지는 이곳에는 파블로의 조각상과 그가 추진한 빈민촌 기부사업인 '슬럼 없는 메데진'에 대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파블로는 정부의 관심 밖이었던 원주민들이 살던 판자촌에 4000가구가 넘는 주택을 무상 공급했으며, 학교, 병원, 운동장 등의 시설들을 설립했다. 이곳에 전기와 물을 공급한 것 또한 파블로였다.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개인이 자선 사업으로 이뤄냈으니, 그들에게 파블로는 곧 종교며 국가였다.


꼬무나 13

메데진 카르텔의 영향력이 가장 많이 미친 곳은 '꼬무나 13'이다. 과거 총격전이 일상이었던 이곳은 경찰이 진입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파블로가 죽고 난 후 정부는 그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이곳에 숨어든 카르텔 세력을 쥐 잡듯이 잡았다. 그 결과 현재는 위험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메데진 대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메데진에서는 여전히 마약이 대중적이라, 포브라도와 같은 부촌 지역에서도 예외 없이 마리아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언론의 관심과 경찰의 집중관리 덕분에 꼬무나 13은 현재 메데진에서 유일하게 마약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메데진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고 활기찼던 꼬무나 13. 현재는 마약 냄새와 총성 대신 그라피티와 힙합 음악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최근 폭발된 모나코 빌딩

메데진 시내에 위치한 모나코 추모공원 또한 파블로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명소다. 지금은 폭발되어 없어진 모나코 빌딩은 파블로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이었다. 어느 날 그의 주적이었던 칼리 카르텔이 이 앞에서 폭탄테러를 자행했고, 그로 인해 파블로의 딸은 청력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화가 폭발한 파블로는 국민영웅 이미지를 버리고 테러리스트로 전향하며, 본격적인 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몇 년 간, 메데진 전역에서 벌어진 메데진 카르텔과 칼리 카르텔의 테러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파블로에 의해 죽은 사람의 수는 약 4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모나코 빌딩이 있던 자리는 파블로에 의해 희생된 시민과 경찰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테로가 그린 파블로의 죽음

파블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콜롬비아 대표화가 보테로는 그림을 통해 파블로의 시대를 기록했다. ‘파블로의 죽음’을 비롯하여, 테러 현장을 그림으로 표현함으로써, 사건이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염원했다. 산 안토니오 광장의 보테로 조각상에는 테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참 카르텔 전쟁이 불타오르던 시기에 이곳에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3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었다. 보테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손상된 작품을 철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고, 그 옆에 다시 새로운 작품을 설치했다. 그리고 테러에 흔적이 남은 작품에는 ‘전쟁의 새’, 새로 만든 작품엔 ‘평화의 새’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 카 세드랄

메데진에서 남쪽으로 약 30킬로 정도 떨어진 산속에는 파블로가 수감되었던 감옥이 있다. 미국으로 이송되기를 원치 않았던 파블로는 큰 놔물을 들인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이곳에 수감될 수 있었다. ‘라 카세드랄’ 대성당으로 불리는 이 감옥은 사실 클럽, 바, 축구장, 심지어 헬기 승강장까지 구비되어 있는 대저택이었다. 파블로는 직접 지은 이곳에 스스로 수감됐으며, 감옥 경비원들 또한 직접 고용했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에 보여주기식 옥살이를 하며 호화 생활을 누렸다. 파블로가 탈옥한 후 이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최근에 정부 관할의 요양원으로 변모했다. (고로 현재는 내부 관람이 불가능하다) 요양원 입구에는 ‘이곳은 더 이상 파블로 저택이 아니며, 파블로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었다. 정부는 파불로 감옥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그의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하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요양원 위에 위치한 작은 교회에서는 과거 파블로의 경비원이었던 할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요양원으로 바뀐 후에도 이곳에서 계속 살며 요양원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경비원으로 일할 뿐,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무심한 태도에 놀랐지만, 당시 파블로에게 고용된 경호원만 3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파블로를 위해 일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폴레스

메데진에서 차로 4시간 떨어진 마을에는 파블로의 동물원으로 불리는 ‘나폴라스’가 있다. 파블로는 세계 각지에서 각 대륙을 대표하는 동물들을 밀수해 왔다. 그는 호주에서 멸종위기종이었던 앵무새 한쌍을 400만 달러에 수입해 오기도 했는데, 이 새는 현재 지구 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파블로가 밀수한 동물 중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하마다. 하마가 서식하는데 콜롬비아의 기후환경이 본토인 아프리카보다 적합했으며, 천적도 없기에 하마들은 폭풍 번식을 했다. 그 결과, 파블로가 가져온 4마리의 하마는 130마리로 급증했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중이다. 하마는 거대 동물로 유지비용이 많이 들고, 성격이 포악하여 마을 주민들을 공격하는 사고도 종종 벌어지고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콜롬비아 정부는 원래 하마를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이는 동물보호법에 어긋나는 불법행위로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죽은 파블로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경찰들

파블로는 죽기 직전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추적당할까 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전화기를 켜서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는 추격 도중 총상으로 사망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들은 파블로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지만, 빈민촌에서 만났던 파블로의 추종자들은 그가 스스로 권총 자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감옥에 있느니 콜롬비아 무덤에 있는 게 낫다”는 말을 했던 파블로인 만큼 자살에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붕 위에서 총에 맞아 죽은 파블로와 그 앞에서 경찰들이 웃으면서 찍은 기념사진은, 범죄자를 잡은 경찰이 아닌 멧돼지를 잡은 사냥꾼들의 모습처럼 기괴한 느낌을 준다.

몬테 사크로 공동묘지에 묻힌 파블로와 그의 가족

서서히 사라져가는 파블로의 흔적을 따라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파블로의 무덤이었다. 그는 그가 태어난 곳이자 세력을 떨렸던 메데진 땅에 묻혔다. 그의 무덤 앞에서 그에 대한 그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질 뿐이었다.






-극친미국가의 반미열풍


미국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중남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만큼 특히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국은 중남미 국가들이 조금이라도 반미 성향을 보이면 기강을 확실히 잡기 위해 무자비한 경제제재를 가해왔다. 그 결과 중남미는 전체적으로 친미 성향을 띠며, 그중에서도 가장 친미적인 국가는 당연 콜롬비아다. 누가 ‘반미감정 없는 나라가 어딨냐’고 물으면, ‘콜롬비아요’라고 답했을 정도다.

콜롬비아의 친미 성향은 소도시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관광객이 드문 시골에서 동양인인 나는 종종 동네 꼬맹이들의 관심대상이였다. 학교에서 배운 영단어와 함께 손짓 발짓 섞어가며 어떻게든 나에게서 정보를 얻어가려는 시골아이들의 노력은 귀엽고도 기특하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나의 나라’에서 ‘나의 여행기’로 흘러가는데, 그동안 중 가장 관심을 끄는 나라는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이였다. 뉴욕은 (미국 영화는 뉴욕에서만 찍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촬영지이자, 많은 중남미인들이 목숨을 무릅 쓰고라도 가고 싶어 하는 꿈의 도시다. (실제로 목숨을 많이 무릅쓴다) 뉴욕에 가봤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냥 외국인’에서 ‘뉴욕에 가본 대단한 사람’으로 돌변했다. 뉴욕에 대한 환상이 어찌나 큰지, 콜롬비아의 시골에서는 ‘누에바 욕’이라는 이름의 구멍가게나 식당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한편 이는 그만큼 반공감정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콜롬비아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핸드폰 게임은 ‘피델’을 죽여야만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엔 피델이 살아있었다.) 뉴스에선 매일 쿠바나 베네수엘라에서 넘어온 난민들의 모습이 보도되었고, 콜롬비아인들은 그 뉴스를 보며 혀끗을 찼다. 콜롬비아인들과의 대화는 주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디서 왔니?” 꼬레아” “남한? 북한?” 나는 “남한”이라고 대답하지만, 내 대답과 상관없이 이어지는 질문은 늘 북한에 관한 것들이었다. 북한에 관심이 쏟아지는 이유는 순전히 ‘악감정’ 때문이다. (콜롬비아는 한국전쟁 때 미국, 터키 다음으로 군인을 많이 지원해준 나라 이기도하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들이 베네수엘라를 혐오하듯 북한을 혐오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도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콜롬비아와 베네수에라는 ‘그란 콜롬비아’로 불리는 통일된 나라였다. 하지만 그란 콜롬비아는 붕괴되었고, 이후 콜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친미적인 국가가, 베네수엘라는 가장 반미적인 국가가 되었다. 미국의 정치 제재로 베네수엘라가 파산하면서 이 둘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만큼,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 난민 문제’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약 170만 명의 베네수엘라인들이 콜롬비아에 거주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회적 기회를 얻지 못한 베네수엘라 난민들은 구걸을 하거나 범죄에 연루되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이를 규제하기 위해 뒤늦게 육로를 닫고 ‘베네수엘라-콜롬비아’ 직항 노선을 없앴지만,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사이엔 2200km의 긴 국경을 통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6년 만에 다시 찾은 콜롬비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바로 올해 콜롬비아에서 최초로 공산주의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동시에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도 탄생했다.) 그동안 콜롬비아에서는 공산파 후보들은 꾸준히 선거기간 동안 살인되어 왔다. 공산파는 대선에 출마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던 콜롬비아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트럼프 이후 세계적으로 거세진 반미감정으로 인해, 현재 남미 대부분의 나라에서 좌파 대통령이 당선되긴 했지만, 그 어떤 나라보다도 친미적인 콜롬비아에서까지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는 콜롬비아 정치계에 큰 바람이 불고 있는 분명한 신호이며,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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