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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노트] 숨은 신(神)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히스테리안
IMG_8848.JPG 2016년 경주에서


현대사회에서 ‘믿음’은 추상적인 영역에 머뭅니다. 어떤 사실이나 신념을 믿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동(動)해야지, 일어나는 일이기에 마음이 동하는 특정한 사건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믿음을 이루는 중요한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믿는다는 마음 자체가 믿음의 영역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역사적 증언이나 증거가 기록되지 않더라도 입으로 전해진 민담이나 설화에서 믿음의 근거를 찾을 수 있듯이 사실의 여부는 마음의 믿음을 형성하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믿는 것이 종교로 불릴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신(神)을 믿는다는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저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창조주는 자연의 현상이므로 지수화풍이 아닌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류사는 신의 존재 여부를 밝히고 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혈투로 문명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의 존재가 왜 이토록 인류사에 중요한 것으로 남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몇천 년, 몇만 년을 거쳐 살아온 인류가 매달려온 ‘종교’를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종교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되풀이해 온 역사에서 죽음으로 인한 허무와 비탄함을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망각하는 존재이므로 기록되지 않은/없는 비(悲) 역사의 행간을 알고자 했고, 인류는 최대한 많은 것을 기록하는 것을 의무화했습니다. 허나, 모든 것은 기록될 수 없겠죠. 그러므로 인류에게 역사-쓰기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문학, 예술, 사상으로 확장되었고 예로부터 종교는 언어, 문화,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하나의 그릇과도 같습니다. 동양 종교와 서양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문화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겠지요.


종교전쟁은 자본과 경제, 물질적인 것들과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오늘날 심층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종교에서 신은 세상을 창조하는 절대자의 이미지도 있겠지만, 그 행간에는 인간의 믿음 서사와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의 창조자, 유일신 하느님은 유대교에서는 야훼(Yahweh), 이슬람교에서는 알라(Allah)로 불립니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서구철학과 문화 사상을 대부분 차지할 정도로 그 존재 여부와 그의 말씀이 역사로 새겨집니다.


놀랍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을 믿고 그를 따르는 의식을 의례/제도화하여 대대손손 그 뜻을 기리고 믿는다는 것에 대해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어디에 있나요. 신의 목소리를 따라 그의 말씀을 새긴다는 의미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정확히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종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교리와 신념 체계, 의례를 통해 종교 공동체를 확립합니다. 이들이 모이는 공간자체가 종교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들이 갖춰지더라도 믿는다는 것은 의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겁니다. 종교를 믿게 되는 가장 큰 배경은 자신이 직접 겪은 종교체험 또는 신비체험이 큽니다. 종교적 체험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개인 차원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해도 경험으로 느꼈던 감각들은 초현실적인 차원으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이렇다 할 사건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그렇다고 갑자기 일어난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추운 겨울 머물렀던 사찰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병환에 걸리신 후,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지인이 운영하는 사찰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사찰은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알고 계신 지인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원래 스님이 아니었습니다. 고물상을 운영하시던 부부가 갑자기 사찰을 운영하게 된 것이지요. 이상했습니다. 어릴 때 그 집은 부부싸움을 종종 하던 곳으로, 남편 되는 분의 주폭으로 인해 아주머니가 꽤 힘들어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눈 밑에 파란 멍을 지니며 엄마와 해사하게 담소를 나누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스님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저에게 스님, 종교인은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부 내외를 아버지가 아프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랜 병원 생활 후, 건강한 식습관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찰에서의 생활이 건강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어릴 적 기억과는 다르게 스님이 된 아저씨는 우리 가족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고 아주머니는 저희에게 제철 나물과 밥을 지어다 주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곳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눈이 소복이 내린 한겨울, 도시와 외따로 떨어진 곳에 발끝이 시린 사찰의 생활은 아직 어린 저에게 울컥한 서러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픈 아버지의 고통과 생사의 기로를 지켜보면서 두려움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어간다는 일은 서글픈 일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죠. 갈 길 잃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불당을 찾았습니다. 기도와 절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반문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원망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마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잊혔고 저는 아버지 나이와 가까워집니다. 그 후, 몇 년간 잊고 있다가 마음 둘 곳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 생사의 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닥치면 이성적 이해와는 다르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고뇌가 삶을 사로잡습니다. 불온한 운명이 자신을 습격했다는 부당함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우연이며 필연이라는 것임을, 그것이 단 하나의 진리인 것을 종교를 통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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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경주 남산, 2024년 일본 군마현에서 ㅡ 잃어버린 불두를 찾아서


불교의 경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경은 말룽꺄뿟다(Mahāluṅkya)와 붓다와의 대화입니다. 말룽까뿟다는 붓다의 제자 중 한 명으로, 그는 붓다에게 여러 가지 존재론적, 교리적 문제에 대해 질문합니다. 붓다는 이를 명쾌하고 논리적으로 답변합니다.


만일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하다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거나, ‘세상은 유한하다.’ 거나, ‘세상은 무한하다.’ 거나, ‘생명이 바로 몸이다.’ 거나,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다 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 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설명해 주시면 세존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으리라. 말룽꺄짧은경 (M63)


말룽꺄뿟다는 붓다에게 세상의 기원, 세상은 영원한가, 생명이 몸이거나 생명은 몸과 다른 것이거나, 사후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말룽꺄뿟다는 존재와 비존재를 규명하려고 했고, 이는 ‘자아’와도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나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사후에도 ‘나’가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윤회설도 이 대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붓다의 답변은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붓다는 "자아"는 단지 변화하는 요소들이 모인 집합체일 뿐이며, 고정된 실체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 존재는 다섯 가지 오온(五蘊, Panchakkhandha)—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다섯 가지 요소가 결합(색은 물질이며 수상행식은 느끼는 감각에 대한 것입니다)하여 사람을 형성하지만, 그 자체로 실체적인 자아는 없다는 가르침을 전합니다.


붓다는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 짓는 세계, 존재와 비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러한 질문 자체가 있음과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 문제에 빠져, 정작 중요한 청정함을 잃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붓다는 고정된 자아가 없고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만 다를 겁니다. 제 자신도 그런데, 사람과의 인연 또한 얼마나 변화무쌍일까요. 모든 물질은 변화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애환을 겪고 있다는 것, 유약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연민하는 마음, 사랑을 품은 슬픈 자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요.


인간에게 종교는 앎의 세계를 넘어 스스로 그러한 세계, 일어나는 세계를 자연히 알게 되면서 불안한 마음을 들여다보는 힘이 중요합니다.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차이를 보자면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국에서 믿음/신의 개념은 평안한 삶과 바라는 기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연기법에 의해 상호 의존하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해탈/열반의 길을 통해 자신과 우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동양 철학 중 도교는 자연의 흐름을 조화롭게 사는 것을 강조하죠. 서양은 절대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며 메시아-구원자-예언자가 도래할 것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종교는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 믿음의 근간을 이룹니다.


오늘날 현대종교는 전통적인 교리와 의례 중심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양한 종파가 형성되었고 믿음의 주체인 ‘신’의 얼굴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세속화의 영향은 개개인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종교를 확립하는 과정 또한 영성을 근간하지도 않습니다. 세속화는 종교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교단을 운영하기 위한 자본과 정치의 합일은 속세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종교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와 삶터를 잃어버린 자들의 자리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종교의 부정성은 날로 더 커질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종교’가 파괴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모순적인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의미로 종교를 축약해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옳은 이치와 가치를 찾기 위해서는 지금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무상함이 오는 변화가 다시 시대를 끌어낼 것이라는 믿음이 인류를 지금 여기로 이끌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교를 형성한 창조주의 계보를 살펴보면 불온한 시대로부터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았다는 점입니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지금과는 다른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며 유한한 삶의 본질에 관해 물었던 거죠. 신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삶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차원을 인지하고 회복하려는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입니다. 종교는 여전히 오늘날 현대사회에 개인의 불안을 덜어주고 공동체의 연대 감각을 상기시켜 줄 중요한 플랫폼이기도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이념적 대립의 본질로 접근은 종교의 목적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할 때이기도 합니다.



2024년 1월 22일, 일본 군마군에 위치한 吉祥寺



아르헨티나 문학가 보르헤스는 유럽에서 20대 중반 유럽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어느 시골길에서 모든 예술의 원형이랄 수 있는 ‘시간 체험’을 겪었다고 합니다.* 발길 따라 정처 없이 걸은 산책길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빛이 나오며 비시간 속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한 추상적 관찰자가 되어 ‘영원’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가 마주한 이 원초적인 ‘형이상학적인 공포’는 보르헤스의 문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미래가 현재로 흘러 들어온다.


미래의 어느 시간을 의식하고 그것에 기초해 소망하는 미래상을 그려낸다면, 그때부터 그 미래상은 현재를 의욕적이고 건설적인 창조의 시간으로 바꿔 놓을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굴리는 성인의 설법이 미래의 성취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이어져 커다란 인력(引力)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바라는 마음, 소망하는 마음이 부르는 주문과도 같은 선문답은 시간은 소멸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잇따른 연쇄적 작용으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자아自我를 비아(非我)가 아닌, 무아(無我)라고 칭합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나’라고 부르냐는,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은데 어떻게 ‘나’라는 고정된 주체로 볼 수 있는지를 뜻합니다. 그 뜻은 ‘윤회의 주체’가 무엇인가와도 연결됩니다. 고정된 내가 없는데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불교의 무아는 모든 것이 나가 될 수 있고 깃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미혹(迷惑) 한 상태, 즉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무지를 불교에서는 가장 큰 업(業)으로 봅니다. 이 업으로 인해 괴로운 과보를 받는 삶이 과거, 미래, 현재로 끊임없이 연기하여 이어지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 묘연한 이야기는 시야 안팎에서 보인다고 여겨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을 이미지로, 삶의 앎으로, 살갗의 감각으로 실체화할 수 있을까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소멸이 죽음으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과거의 업이 동시적으로 작동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동시에 출현하는 필현성을 기다립니다. 보이지 않음으로써 존재하고 드러남으로써 사라지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싶습니다. 연기적으로 작동하는 감각을 양분 삼아 찰나의 수많은 존재를 온전히 느끼고 싶습니다. 다수의 나와 나가 만나는 과정에서 욕망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동기입니다.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만난 우리의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습니다.


기차에 몸을 맡겨 직선의 길을 달린다.

기차는 수많은 나무와 사물을 스쳐 지나칩니다. 더 빠르게, 앞으로 향하기를 욕망합니다. 욕망할수록 시간은 강물과도 같이 흘러갑니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 따뜻한 보금자리와 맛있는 식사를 원하는 마음, 물질의 값어치를 무기 삼아 일직선의 길을 달립니다. 서로 간 닮아있는 욕망은 겹겹이 쌓인다. 욕망을 소망할수록 욕망은 환영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 환영은 나의 욕망이 아닙니다. 욕망 바깥에 욕망을 거세당한 순수한 자기(自起)가 자리합니다. 나는 나인 것과 나 아닌 것 사이, 안팎을 횡단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텅 빈자리에서 태어나기도 전인 천팔백 몇십 년에 머물렀었던 곳에서의 나에 대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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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6일 네팔, 히말라야의 어느 산기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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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산과 바다는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서양의 종교적 배경과 문화로 인해 차이점이 있지만 공통점은 초월적 차원과 연결을 중시한다는 점과 인간의 유한성과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열망해 온 종교는 앎의 세계 바깥, 보이지 않는 차원과의 연결이 유한자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수단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동굴 바깥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고대인들이 안팎을 나서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이 실재한다는 재현의 원초적인 욕망이 예술의 시초라고 본다면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불확실성과 기생합니다. 유한한 삶이라는 공통적인 사건을 함께 마주하는 일이 종교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묻고자 합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우리 안팎에 머물러 있습니다.





* 「보르헤스, 불교에 빠지다」, 불교평론, 2016.09.10., 2024.1.28. 접속, https://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723 참고)


** 이 글의 일부는 『옵드라데크: 출몰과 커먼즈 예술론』(2025, 히스테리안 출판사)에서 발표한 「공백의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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