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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씨앗이 알려준 것들

정성과 기다림

by 서담

베란다 난간 옆, 눈에 띄지도 않게 놓여 있는 작은 화분 하나. 처음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먹고 남은 파프리카 씨앗 하나, 버리기 전에 아내가 무심한 듯 심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저 한번 해보는 거지, 욕심도 기대도 없던 실험 같았던 그것이, 이제는 하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자기야, 얘 좀 봐봐. 색이 노랗게 물들어가. 너무 예쁘지 않아?”


아내는 아침마다 마치 아이를 깨우듯, 파프리카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잘 잤니?”, “오늘도 힘내자~”, “정말 대단하다, 이 무더위에도 싱싱하다니.” 칭찬은 빠짐없고, 물은 꼭 제때에 준다. 대단한 걸 해준 것도 아닌데, 그 마음 씀씀이가 이 작은 생명을 이토록 다부지게 키웠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여름이면 금세 시들거나 벌레가 생기기 일쑤고, 겨울이면 추위에 얼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화분 속 생명은 사계절을 묵묵히 견뎠다. 줄기는 처음보다 두 배는 두꺼워졌고, 잎은 여전히 연둣빛이 선명하다. 지난달 열렸던 열매 하나는 점점 노란색으로 익어가고, 그 옆엔 제법 통통하게 자라난 또 하나의 열매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내가 이 파프리카를 바라보며 가장 놀라는 건 단지 생장의 기적이 아니다. 그 생장 뒤에 있는 ‘정성’이라는 힘, 그리고 그것을 매일같이 꾸준히 보여주는 아내의 손길이다. 말없이 다가와 잎을 쓰다듬고, 흙을 만져보며 물을 조절하고, 열매 하나하나에 말을 건네는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생명의 존귀함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너는 참 복도 많다. 내가 이렇게 매일 칭찬해 주는 식물이 어디 있겠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존경이 섞여 있었다. 어떤 대단한 기술보다, 어떤 특별한 비료보다, 매일같이 건네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이토록 누군가를, 무언가를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으니까.


우리는 흔히 성장을 ‘크기’나 ‘속도’로 평가하지만, 진짜 성장은 생명을 향한 정성과 관심, 그리고 지속적인 사랑에서 오는 것 아닐까. 이 화분 하나가 말해준다. 무심히 던진 씨앗이 어떻게 기적이 되는지를. 그리고 그 기적은 우연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과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파프리카 열매가 조금 더 익어갈수록, 내 마음에도 무언가 하나씩 차곡차곡 쌓인다. 정성과 기다림, 그리고 사랑의 의미 같은 것들이다. 오늘도 나는 화분 앞에서 잠시 멈춰서 그 열매를 바라본다. 아내가 건네는 칭찬을 들으며,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익어간다.


한 줄 생각 : 작은 생명을 키우는 건 흙이 아니라, 매일 잊지 않는 따뜻한 말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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