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는 일
언제부터였을까. 내 스케줄표 속 빈칸이 사라진 때가. 한때는 친구와의 약속, 업무 미팅, 중요한 일정들이 날짜를 먼저 차지했다. 그 사이 나를 위한 시간은 늘 ‘언젠가’로 미뤄졌다. 그 ‘언젠가’는 바쁜 하루의 끝자락에서 지쳐 쓰러진 밤이거나, 주말이라 불리지만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집안일이 쌓인 날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내 스케줄은 조금 다르다. 회의보다 먼저, 약속보다 먼저, ‘나와의 시간’이 캘린더를 차지한다. 출근길 절반은 자전거 타기 20분, 40분은 걸으며 주변경치도 보고 글쓰기도 구상한다. 점심 먹고 주변 산책과 독서, 아내와 저녁식사, 집까지 걷기 30분, 하루 정리 글 한편 쓰기 등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나와의 약속들은,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스칠 때,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부엌에 퍼진다. 컵에 따뜻한 물 한잔을 붓고 마시며, 그 위로 김이 올라오며 하루가 조용히 시작된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아무에게도 쫓기지 않는다. 한 모금의 따뜻함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마음도 천천히 풀린다. 이건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나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다.
주말이 되면, 운동화를 신고 집 앞 숲길을 걷는다. 발걸음마다 하루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진다. 바람은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숲 속 나무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아무 말 없이, 누구와 경쟁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속도로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한주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씩 정리된다. 불필요한 걱정은 발뒤꿈치에 묻어 버리고, 남겨야 할 감사는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이런 시간들은 작아 보인다. 그렇지만 이 작음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를 버티게 한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것도 좋지만,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남겨두는 건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지친 채로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나를 위해 하는 약속들도 있다. 저축 통장에 매달 넣는 적은 금액, 건강을 위한 운동, 조금씩 쌓아가는 성장을 위한 글쓰기 노트. 지금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 나를 구해줄 씨앗들이다. 그 씨앗을 심는 순간에도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약속들이 사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은 약속들을 지켜낸 하루는 이상하게도 더 충만하다. 마음은 여유롭고, 하루는 단단하다. 어쩌면 우리는 큰 성취가 아니라, 작은 자기 약속을 꾸준히 지키는 것으로 성장하는 게 아닐까.
이제 나는 스케줄표 속 나와의 약속을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적는다. 그 약속이야말로 내가 나를 잃지 않게 하는 마지막 방어선이니까. 그리고 그 시간들을 채워가며, 나는 조금씩 나에게 더 친절한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