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두 번의 삶을 선사한다

나를 남기는 일

by 서담

삶은 누구나 산다. 그러나 살아낸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매일의 사건과 감정을 대개 마음속 어딘가에만 묻어둔다. 그때의 웃음, 아픔, 설렘, 두려움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지고, 결국은 사라진다.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하다. 기록은 사라질 기억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행위다. 흩어지는 감정을 붙잡아 단어로, 문장으로 새겨둔다는 건 곧 ‘나를 다시 살아내는 일’이다. 기록은 현재를 붙잡는 동시에, 과거를 불러내고, 미래를 비춘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얼마나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까? 그때의 표정, 목소리, 냄새, 햇살 같은 감각들은 세월 속에 금세 퇴색된다. 하지만 한 줄의 기록은 그 모든 것을 다시 불러온다. ‘그날의 나는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기록은 내 안의 시간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한다.


기록하는 힘은 대단한 재능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저 하루를 조금 더 주의 깊게 바라보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짧은 문장, 삐뚤빼뚤한 글씨, 서툰 표현이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그날의 나를 남기는 것이다. 그 순간의 호흡과 감정이 담겨 있는 한, 그 기록은 이미 충분히 빛난다.


기록은 내 삶의 과정을 ‘객관적인 나’로 바라보게 한다. 그날의 나를 써 내려가다 보면, 나는 내 감정에서 반 발짝 물러난다. 슬펐던 사건도, 분노했던 일도, 기록하는 순간 조금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땐 그랬구나.” 그 깨달음 속에서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진다. 기록은 결국 나를 치유하고, 나를 성장시킨다.


때로는 기록이 두려울 때도 있다. 글로 남기는 순간, 그날의 감정이 더 생생하게 다가와 버려서. 하지만 그 두려움조차 기록해야 한다. 쓰면서 울고, 쓰면서 웃고, 쓰면서 잊어야 할 것도 잊는다. 기록은 무거운 감정을 흘려보내는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늘 빠르다. SNS의 짧은 피드, 흘러가는 소식, 빠르게 소비되는 말들. 그러나 진짜 나를 마주하는 건 느림 속에서 가능하다. 기록은 그 느림을 가능하게 한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멈춘다. 그 멈춤 속에서 비로소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된다.


어쩌면 기록은 나 자신을 존중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내 하루는 남길 가치가 있다’는 믿음으로 한 줄을 적는 것. 그 믿음이 쌓여갈수록, 나는 내 삶을 가볍게 지나치지 않게 된다. 그날의 날씨, 마음의 결,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한다.


기록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진다. 몇 해가 흐른 뒤, 우연히 꺼내본 낡은 노트 속 문장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다. “너, 이렇게도 살아냈잖아.” 그 목소리는 누구의 위로보다 깊고 진하다.


삶은 누구나 산다. 그러나 기록하는 사람만이 삶을 두 번 산다. 한 번은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은 기록을 읽어내는 순간. 그 두 번의 삶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넓어지고, 조금 더 깊어진다.


오늘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아마도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에. 기록은 미래의 나를 위한 선물이다. 그 선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결코 자기 삶을 헛되이 지나치지 않는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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