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건너는 문장들

펜을 드는 순간, 삶은 다시 이어진다

by 서담

어떤 날들은 생각이 제자리에 머무른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흘렀는데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고, 삶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질문은 늘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왜 나는 아직 여기일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펜을 들고 그 시간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생각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깨닫게 된다.

좋았던 일만이 아니라, 뼈아픈 실패와 견디기 힘들었던 눈물조차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재료였다는 사실을.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작은 조각들 역시 저마다의 온도로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글은 기억을 미화하지도, 상처를 감추지도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 꺼내어 놓고, 그 의미를 다시 묻도록 만든다.


글쓰기는 시간을 건너는 대화이기도 하다.

1년 전, 혹은 10년 전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글이다. 과거의 나를 바라보며 “참 애썼다”라고 다독이기도 하고, 그때의 순수하고 서툴렀던 나에게서 지금 필요한 용기를 빌려오기도 한다. 원고지 위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해 자신과 대화하고, 그 과정 속에서 묘한 우정을 쌓아간다.


글이 쌓이는 만큼, 나의 세계도 조금씩 넓어진다.

글이 나를 빚어갈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래서 더 이상 “왜 내 삶은 제자리일까”라는 질문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 한, 삶은 반드시 어딘가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다 보면 방향이 보이고, 방향이 보이면 목적지도 뒤따라온다. 오늘의 글쓰기는 그시간들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걸음이다.


글을 쓰는 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그저 오늘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지금의 생각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행위는 삶을 다시 정렬하는 힘을 가진다.


감정이 흩어질 때는 생각을 붙잡아 주고, 생각이 흔들릴 때는 마음의 중심을 되돌려준다. 글은 그렇게 나를 다시 나에게로 데려온다.


돌아보면, 글은 늘 내 편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저 솔직하기만 하면 되는 자리. 글 앞에서는 실패도, 미완도, 불안도 모두 환영받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기준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호흡으로 시간을 건너기 위해.


삶의 여정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하루의 문장, 한 편의 글, 몇 줄의 기록이 모여 어느새 길이 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자주 흔들리고, 때로는 방향을 잃지만, 멈추지 않는 한 다시 이어진다. 글쓰기는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 준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계속 나아가기 위해.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걷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일은, 내 삶의 여정을 이어 가겠다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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