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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창 Dec 23. 2023

현재(현대) 밖에 살 줄 모르는 예술가의 사명

철학자 최진석

SUMSEI 브랜드의 송년행사 <융합 2023>에 자리해 주신 교수님께서, 행사 후에 남겨주신 후기는 이러했다.


[오늘은 인류 문명의 진화는 "신으로부터 벗어난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가는 과정이자,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인공이 자연화 혹은 스스로 자연을 만드는 과정"임을 확인]


SUMSEI는 어떻게 장르가 되는가 를 발표한 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기고하신 아래의 글을 일독하길 권해주셨다. 지금 섬세이가 하려는 일이 바로 현재(현대)를 살아보려는 예술가의 일이라고 느끼신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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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현재를 살 수 있을까? 인간이 현대를 살 수 있을까? 자신을 구성하는 말들과 관념과 습관 그리고 인식의 틀들은 익숙해지는 순간 과거다. 인간은 긴장하지 않으면, 이 틀에 갇혀 평생 과거를 살다 간다. 인간 가운데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에서 빗겨나 문명의 향도(向導) 역할을 한다. 예술가들! 그들의 능력은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과거를 살 때, 긴장감을 잃지 않고 현재(현대)밖에 살 줄 모른다는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그들의 투쟁으로 세상은 비로소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그들이 자신을 괴롭히기까지 하면서 일부러, 인위적으로, 애써 하는 해석이 없다면, 보통 사람들은 현재(현대)를 살면서도 어느 시대를 사는지 모른 채, 그저 숙제처럼 하루하루를 넘길 뿐이다. 예술가들의 긴장감 있는 수고를 보고, 평범한 사람들은 자칫 맹목성에 빠질 자신에게 지적인 세례의 기회를 주면서 비로소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로크 당시의 평범한 사람들은 평면성과 폐쇄성에 갇힌 르네상스를 벗어나 입체성과 개방성을 향해 새 시대로 건너가야 한다는 지적인 호소를 귀담아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적인 호소’의 결과물이 바로 다름 아닌 바로크의 예술 작품들이다. 당시에는 베르니니나 루벤스 등 몇 명의 예술가들만 정해진 인식의 틀에 갇혀 평범해져 버린 세상에서 현재(현대)의 의미를 발굴하느라 이질적인 광기를 발휘하였다. 사실 예술가들은 현재를 철저히 발굴하는 전사들이다. 현재를 발굴하는 탄력으로 미래를 알리는 깃발이 된다. 나중에 고전주의자들에 의해서 ‘찌그러진 진주’라는 의미의 이름인 ‘바로크’를 얻었고, 그 이름에 다분히 비아냥이 섞여 있더라도, 어쨌든 이름을 얻어 존재가 되었다.

            

예술은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와 삶의 진실을 알게 해준다. 가끔 위안을 얻는다거나, 쾌락을 얻는 것으로 예술의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술을 감각적이거나 본능적인 산물로 오해하면 이럴 수도 있다. 이런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예술의 근본이나 전부는 아니다. 예술은 철저히 지적인 산물이다. 알아야 할 진실을 알게 해주거나, 잃어버린 진실을 찾아주거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 주면서 인류에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진실의 영토를 넓혀준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신을 편안하게 감싸주던 기존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자신의 울타리 밖으로 진실의 영토가 갑자기 넓혀지면서 얻어지는 묘한 당혹스러움과 흥분을 우리는 감동이라 한다.


진실의 주요한 한 형식이 ‘전체’ 혹은 ‘전부’에 관한 것이지만, 인간은 사유의 진보에 한계가 있고, 표현하는 기술이나 재료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전체성을 쉽게 장악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누구나 시대의 한계나 인식의 틀을 넘어서기 힘들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언제나 미답의 영토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미답의 영토에 관심을 끄고 안락한 생활을 택하지만, 예술적 기질을 가진 소수의 누군가는 용기를 내어 기존의 울타리를 파괴하며 미답의 그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진실을 향한 인간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경로는 ‘전체’를 향해 나아간다. 원근법도 ‘전체’를 향해 가는 진보의 한 형식이다. 2차원 평면에다 3차원의 세계를 표현할 기술을 가지게 된 것은 ‘전체’를 향한 일대 도약이다. 원근법이 없던 시대의 표현 능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던 영역이 원근법으로는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원근법을 구사할 수 있게 진보하면서 진실의 영토를 새롭게 넓혔다.


여러 다비드상이 있지만, 유명하기로는 르네상스 시기 미켈란젤로의 그것이 최고일 것이다. 하지만, 전체성을 향한 지적 진보의 여정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바로크 시대 베르니니의 다비드상을 더 높게 쳐야 하지 않을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멈춰 서 있다. 생긴 것은 입체적이지만, 표현 범위는 평면적이다. 정지한 순간으로 영원성을 잘 포착하였지만, ‘2차원적 입체감’으로 표현된 영원성은 전체성을 담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전체성에는 뒤틀린 몸, 앙다문 입으로 드러날 것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몸을 한껏 뒤틀어 투석기를 손에 들고 돌팔매를 금방이라도 폭발시킬 것 같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에서는 투석기를 벗어난 돌의 궤적이나 돌에 맞아 쓰러지는 골리앗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베르니니의 그것에서는 다 보인다. 베르니니의 다비드가 보여주고 포착한 범위는 미켈란젤로의 그것을 넘어선다. 누구의 다비드가 예술적으로 더 잘 승화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전문적으로 따로 따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진실을 향해 가는 인간의 여정에서 예술가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전체성을 포착하는 경로를 착실하게 걸었는지에 중점을 두고 보자.


전체성을 장악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2차원의 평면에 입체의 뒷면을 담을 수 있게까지 하였다. 큐비즘이다. 큐비즘에서는 대상의 앞뿐만 아니라 옆이나 뒤까지도 이곳저곳을 기하학(추상)적으로 해석하여 2차원 평면에다 구현한다. 전체성으로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볼 때, 큐비즘은 일대 도약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의 힘을 볼 수 있다. 구체성으로 멀어질수록, 즉 추상할수록 세계가 더 많이 담긴다. 숫자 2도 추상이고, 삼각형도 추상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둘’로 묘사되는 무한대의 구체적인 경우들은 ‘2’라는 하나의 추상 개념에 모두 담긴다. 구체적 세계에는 무한대로 많은 각각의 삼각형들이 있다. ‘삼각형’이라는 하나의 기하학적 도형은 무한대로 많은 구체적인 삼각형을 다 담는다. 추상이 발휘하는 힘이다.


어떤 사람들은 추상화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거나, 추상화로는 감동할 수 없다고도 말하는데, 이는 추상화의 문제가 아니라 추상화까지 도달한 인간 지성의 진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감상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추상화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한 인간의 분투 노력의 결과다. 추상에는 필연적인 것만 남기고 우연적인 계기들을 제거해버린 의미가 있다. 이래야 전체를 담을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이 현재(현대)를 살 수 있을까? 예술가들이나 예술적인 높이까지 정련된 시선을 가진 소수만 현재(현대)를 살 수 있다. 추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진화가 추상의 단계까지 온 것 정도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일수록 전체를 담지 못한다. 추상할수록 전체성을 담을 수 있다.


구체성을 다 깎아 낸 추상화에 구체적인 표정이 들락거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는가? 추상과 구체가 동시에 꼬리를 물고 공존하는 표현력을 상상할 수 있었는가? 그리기와 지우기가 상호 의존하면서 2차원 평면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베르니니의 다비드가 잡은 돌이 배추나 코끼리로도 바뀌고 불덩이로도 바뀌는 ‘새로운 진실’이 2차원의 평면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골리앗에 명중했던 돌이 다비드에게 되돌아오는 시간의 역진이 2차원에서 표현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시간이 앞으로도 흐르고 뒤로도 흐르고, 심지어는 옆으로도 흐른다. 공간이 시간을 따라 출렁인다.


시간이 개입되어 구체적인 변화의 이벤트가 2차원 평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할 수 있었던가? 2차원의 한 화폭에서 하나의 나무가 불에 타는가 싶다가도 이어서 다양한 분절들로 다양하게 재구성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더니 불덩이를 내뿜으면서 초록으로 재탄생한다. 인류가 장악하는 전체성은 이제 신화적인 레벨까지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와 해석을 근거로 하던 인류가 일대 도약을 해서 자신의 상상대로 전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실의 한 형태인 전체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여정은 이제 여기까지 왔다. 놀랍지 않은가.


이제 우리에게 현재(현대)는 바로 이것, 디지털이다. 지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제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전체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따라 전체를 신화적인 레벨에서까지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를 해석하는 일을 위주로 하다가 이제 예술은 세계를 구성한다. 이제 당신의 현재(현대)는 예술을 통해 ‘표현의 진실’이 아니라 ‘구성의 진실’에 감동한다.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해석’을 근거로 했던 이전의 구성은 이제 구성 축에 끼지도 못한다. 세계의 해석과 발굴에 두었던 지성의 힘이 세계를 생산하고 구성하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런 진화를 이뤄낸 것이 바로 디지털 예술(Digital Art)인 것이다. 예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출처: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702982700762055007&fbclid=IwAR0p00DIbZRPWU3tWsBzfOilepBbAJGUiBL6qvSrOZ3FKcp11Arwdsalx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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