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in 이탈리아 농장일기 1편
2026.03.03. 오후 10시. 강렬했던 스페인 세비야 여행을 마치고 이탈리아 볼로냐에 상륙했다. 앞으로 이틀이면 기다리던 농장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즉시 농장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볼로냐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해 흥미가 없었기도 하고, 해외 생활 중 예상치 못한 지출들로 인해 예산이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용을 최대한 아끼고자 유스 호스텔을 고르더라도 하루 6만 원, 또 배를 채우기 위해 하루 세끼를 먹는다면 적어도 하루 10만 원은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만 원으로 값진 경험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는 장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제미나이에게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물어본다.
"볼로냐는 식문화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정말 딱 맞는 여행지예요! 고기를 이용한 볼로네제 파스타의 원조인 볼로냐를 이탈리아 사람들은 '뚱보의 도시'라고 부른답니다."
지금껏 나누었던 수차례의 대화가 있기에 이 녀석은 내가 어떤 것에 혹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사실 볼로네제 파스타는 그렇게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지만 고기 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단 한 차례도 만족스럽게 먹었던 적이 없었다. 한국의 갈비찜, 프랑스의 비프 뵈르기뇽, 양고기 콩피, 일본의 돈코츠 라멘... 고기의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소스는 처음에는 맛있지만 기름지다고 느껴지며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볼로네제 파스타를 볼로냐에서 먹지 않아서 만족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내가 갔던 식당의 요리사가 볼로네제 파스타의 정수를 재현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나는 농장으로 직행하는 대신 볼로냐에서 하루를 머물기로 한다.
다음 날 아침, 전날 자기 직전까지 고심해서 고른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의 이름은 'Sfoglia Rina', 1900년대에 수제 파스타 면을 팔다가 최근에는 식당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딱 한 끼만을 먹고 볼로냐를 떠날 계획이었기에, 역사가 깊은 이 장소가 참 마음에 들었다.
가장 싼 숙소에서 머물었기에 식당이 있는 도심까지는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당장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에 2유로나 내고 버스를 탈 수는 없었다. 그렇게 20시간 정도를 굶주려 있는 상태로 12kg의 가방을 메고 30분을 걷는다. 평소라면 30분 정도 거리야 가뿐하게 걸어갈 수 있겠지만 가방의 무게와 굶주림은 내 발걸음을 참 무겁게 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엔 다행히도 오픈 직후라 사람이 없었다.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으니 직원이 메뉴 설명을 하러 온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머무는 이유가 정해져 있다. 나는 직원이 메뉴 설명을 시작하기 전, 먼저 가벼운 인사를 한 뒤 탈리아탈레 알 라구(탈리아탈레 파스타면을 이용한 볼로네제 파스타)와 레드와인 한 잔을 시킨다.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메뉴 주문도 끝나고 나니 무언가 안심이 된 느낌이 들며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구성은 예쁜 오렌지색의 라구 소스로 버무려진 탈리아탈레 파스타, 모닝빵 하나, 양배추 피클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냄새를 맡기 전부터 갓 만들어진 파스타에서 짭조름한 고기의 향이 진하게 올라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맛은 의외로 건강한 느낌이 드는 맛이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푹 끓인 다른 고기 요리들과 다르게 느끼한 감이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심심해서 맛이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고기만의 맛으로는 이렇게 내기가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아 토마토 등 야채들이 사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육향을 강화하는 데에만 사용되었을 뿐 전혀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보니 호스트와 만나기로 한 Pontedera행 열차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았었다. 카페에만 앉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도시의 풍경들이 궁금해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굶주림이 얼마나 사람의 의식을 빼앗는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지나쳤던 건물들의 빛깔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웠다. 겉보기에 그들은 참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건물의 외벽은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으며, 흠집을 메꾸려 덧칠하고 보수한 탓에 저마다의 색깔이 다 달랐다. 마치 헌 옷을 기워 입은 듯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런 제멋대로인 색과 모양이 마치 오래된 탠톤 가죽이 에이징 된 모습 같았다. 그 멋에 이끌려 기차역까지 직선거리 30분을 지도 없이 헤매며 2시간을 돌아다녔다.
또 건물마다 있는 회랑들도 도시의 멋을 더했다. 알아보니 볼로냐는 1288년부터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을 지을 때 2층을 확장하여 외부로 돌출시키고, 그 부분을 지지할 회랑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덕분에 어느 곳을 가든 회랑을 통하며, 기둥을 프레임 삼아 멋들어진 주홍색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
이후 나는 열차 시간을 맞추어 호스트를 만나기 위해 Pontedera로 향했다.
뚜렷한 목적지만을 찾아다니던 여행에서 벗어나 조그만 관심을 따라가는 여정을 하다 보면 이처럼 뜻밖의 즐거움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즐거움 탓에 기나긴 여행에 지쳐 집에 돌아오더라도 다시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볼로냐는 내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