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in 이탈리아 농장일기 2편
볼로냐에서 짧은 시간을 보내고 열차를 타 Pontedera로 향했다. 이전 독일에서 열차 지연을 겪으며 비행기를 놓칠 뻔 한 이유로 유럽에서 열차를 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작은 마을인 Pontedera로 가기 위해서는 열차뿐 방법이 없었다. 버스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Flixbus는 모든 곳을 가지 않는구나 하며 아쉬운 소리만을 내뱉었다. 하지만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걱정은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릴 적 나는 몇 가지 버킷리스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언제나 유럽 기차 여행이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는 성,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산과 강, 눈으로 온 세상이 뒤덮인 설원 등, 막연히 '유럽'을 상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기차 안에서 보고 싶었다. 또 한 국가에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그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유럽에서 기차표가 비행기보다 월등히 비싸고, 연착과 취소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안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사라지게 되었었다.
그렇게 유럽 기차여행이 꿈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지금, 그때의 동심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창밖에서는 '토스카나'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초록빛의 작은 언덕들과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농장에 가서나 볼 수 있겠다고 기대했던 그 풍경들이 역과 역 사이를 잇는 공간에 가득 매워져 있었다. 나는 그 초록의 물결로 가득한 풍경이 너무나도 신기해 2시간 정도의 길이가 되는 기찻길을 심심치 않게 보냈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폰테데라에 도착했다. 마리아와는 4시에 만나기로 했기에, 그동안 나는 이곳을 둘러보기 했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폰테데라는 정말 한눈에 보기에도 작은 마을이다. 기차역 밖을 나와 본 풍경은 MT를 위해 주로 가는 대성리에 있는 어느 역 앞모습 같았다. 역 앞에는 조그마한 광장과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별다르게 반겨주는 건물 하나 없어 덩그러니 소환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로는 곳곳에 깨지거나 움푹 파인 흔적이 보였고, 인도의 정비도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는 로마, 나폴리, 피렌체, 베니스 같은 관광지만을 다녔다 보니 항상 사람이 가득했는데, 이렇게 휑한 마을을 보니 이탈리아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관광지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사람이 보이고 붐비는 곳을 찾게 된다면 인파에 몸을 맡겨 헤맬 수가 있을 텐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보니 구글 지도를 켜 식당이나 가게가 많은 장소를 찾아 걸음을 이동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대단한 번화가는 아니었고, 그저 식당이 우연찮게 한 곳에 모여 형성된 상권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 눈에 띄는 한 가게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백 년 가게'처럼, 해외에도 역사가 깊은 가게들이 참 많다. 그런 가게들을 보면 꼭 가게 문 옆에 "Since 19--"라고 간판을 붙여 놓는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백 년 된 가게쯤은 흔하게 볼 수 있어 언제나 꼭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가게들엔 사람의 냄새가 나는 듯해 한 번 기웃거리게 된다. 그리고 내가 본 가게 "Antica Pizzeria Da Cammillo" 역시도 그랬다. 가게의 이름에서부터 카밀로 씨가 운영하는 오래된 피자 가게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는데, 옆에는 1870년부터 운영되었다는 간판이 적혀 있었다.
가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정면으로 커다란 화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피제리아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가게 진열대 안에는 피자보다 커다란 노란색 부침개가 눈에 띄었다. 찾아보니 그 부침개는 체치나(cecina)로, 병아리 콩을 반죽해 만든 폰테데라 지역의 전통 팬케이크라고 한다. 구글의 리뷰를 찾아보더라도 사람들이 주로 찾는 것은 피자보단 체치나인 것 같았다.
모습은 아주 심플했다. 노란색 반죽 위에 빵가루처럼 뿌려진 무언가가 전부이며, 주문하더라도 무언가를 추가해서 먹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반죽에 올리브유를 발라 화덕에 구웠는 듯, 겉은 기름졌으며 올리브유의 향이 은은하게 나왔다. 맛 역시도 아주 심플해 눈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병아리콩의 고소함과 올리브유의 향긋함이 느껴졌으며, 식감은 겉에 뿌린 빵가루 같은 것으로 인해 바삭했다. 구울 때 소금을 많이 쳤는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녹두전을 조금 더 얇게 펴 발라서 소금과 함께 올리브유에 구우면 이런 맛이 날까 싶은 맛이었다.
나중에 마리아를 만나 체치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는데 참 재밌었다. 토스카나의 많은 지역들은 잦은 전쟁으로 인해 많이 가난했는데, 체치나는 그런 상황에서 참 좋은 간식이었다고 한다. 체치나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병아리 콩을 뜻하는 '체체(Cece)'에서 왔으며, 그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병아리콩 반죽이라고 한다. 체체라는 이름이 병아리같이 귀여워서 웃겼다. 체치나는 옛날부터 많이 중요한 음식이었던지 탄생 기원에 대한 전설도 있었다. 어느 날 피사에 정박하고 있던 올리브유와 병아리콩을 실은 선박이 부서지게 되었는데, 바다에 빠져 바다의 소금과 함께 체치나 반죽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여러모로 귀여운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마리아가 데리러 와 주었고, 30분을 차로 이동해 드디어 농장에 입주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집은 꽤나 커 손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이 여럿 있었다. 여름이 되면 올리브 수확 체험을 하거나 토스카나의 풍경 속에서 쉬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숙박을 제공한다고도 했다. 3월인 지금은 시즌이 아니라 모든 방이 비어 있었고, 나는 거실이 딸려 있는 아주 큰 방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시간이 너무 늦지 않은 터라, 마리아는 농장 곳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 곳곳에 자라나 있는 허브들, 마당에 있는 오렌지와 복숭아나무, 야생 데이지 꽃밭 등 농장에는 참 다양한 식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게 식물들을 보며 감탄하던 중, 마리아가 갑자기 땅에서 선인장처럼 생긴 아스파라거스를 뽑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리아는 얼마 전 비가 와 야생 아스파라거스들이 자랐다며, 이렇게 농장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는 기회에 신선한 아스파라거스를 수확해 저녁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밭에서 직접 수확한 것을 먹으며 생활하고 싶다는 내 바람은 그렇게 하루 만에 현실이 되었다.
간단한 농장 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저녁 식사까지 휴식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아직 농장에서 생활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혼자서 산책을 나서며 주변을 더 둘러봤다. 진짜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계획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마쳐 놓았지만 진짜 농장에 와 땅을 밟고 토스카나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니 참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첫날은 어영부영 지나가게 되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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