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메리 올리버를 보내며
시인 메리 올리버가 타계했다고 한다. 아침에 소식을 접하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기사화한 한국 언론이 없다. 한국 내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며 월트 휘트먼을 계승했다고 불리는 시인. 나도 그를 잘 모른다. 김연수 작가의 ‘기러기’ 번역을 통해 접한 게 전부. 국내에 번역된 산문집이 나와 있지만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고 마음만 먹은 게 여러 번이다. 떠나보내고 나서 제대로 책을 펼치는 시인이 늘었다. 슬픈 일이다.
메리 올리버에 대해 소설가 김숨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라고 말했다는 듯하다. 소설가처럼 아름답게 얘기할 순 없지만 나도 그의 시를 읽고서 오랜 시간 잃어버린 걸 되찾은 기분이 든 적이 있다.
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썼듯이 메리 올리버는 ‘제 자신을 학대하는 인간적 자의식’을 내려놓고 ‘우리 안의 동물성(육체성)’을 되찾으라고 강변한 바 있다. ‘인간을 극복해야 도달할 수 있는 부드러운 동물성(“soft animal”)’을 말이다. 나는 그게 일종의 관대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고. ‘이 세상 모든 것들 한가운데’에 네가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무릎으로 사막을 건너지 말고 기러기처럼 네가 있어야 할 곳을 향해 날아가라고.
시인은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알았던 사람이다. 시인의 말이 없었더라면 걷지 못했을 길의 아침 햇살과 저녁 찬바람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시인을 보내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기록이 또 하나 있음을 깨닫는다. 2015년 광화문 교보 현판의 글을 옮긴다.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휘파람 부는 사람』) 고마운 사람을 기리는 방식도 이와 같을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2552.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64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