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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nhyuk kim Jun 12. 2019

그 모든 수런거림에 고마움을 담아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보내며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진행하고 김중혁 작가가 매회 패널로 참여하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 줄여서 ‘빨간 책방’을 처음 들은 건 2012년 9월 23일의 일이었다. 그 전에도 프로그램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 게 그날이었던 건 확실하다.


야외 부스에서 진행된 공개 방송이었기 때문인데 그날 나는 친구의 권유로 얼떨결에 현장에서 방송을 듣게 된 상태였다. 좌석이 한정됐던 탓에 의자에 앉지 못하고 무대 정면에서 약간 비스듬히 벗어난 한쪽 아스팔트 길바닥에 서서 두 시간가량 진행된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다.


홍대 앞 거리에서 서울 와우북페스티벌 북콘서트를 겸해 이뤄진 이날 방송에는 ‘가을방학’과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가 초대가수로 출연했었다. 그날 들었던 계피의 목소리가 내가 처음으로 들은 인디 가수의 라이브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이동진 평론가나 김중혁 작가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그냥 빨간 옷 입은 아저씨와 검은 옷 입은 아저씨가 나누는 푸근한 대화와 초대 가수들의 청량한 목소리를 번갈아가며 들었던 것 같다. 사실 그날의 방송 내용 그 자체는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날의 분위기만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뿌리를 내렸다.


그 당시 나는 심각하게 백지상태였다. 대학생은 됐는데 이제 뭘 하면 좋을지, 심지어는 스스로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랐던 나에게 빨간 책방은 하루가 이런 것들로, 책과 음악과 대화와 길거리 위의 뭔지 모를 어수선함과 뭉클함 같은 것들로 채워질 수 있구나 하고 가르쳐주었다.


책 읽고 영화 보는 일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한 게 그때쯤이었으니 줄곧 방송을 들어오면서도 빨간 책방이 나에게 끼친 영향을 굳이 기록으로 남기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증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일종의 배경음악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는 하얗고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던 대학생 시절부터, 2년간의 군 복무와 취업준비 시기를 포함해,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겨우 혼자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빨간 책방은 그냥 ‘있는’ 것이어서 술 마시고 들어와서 잠이 잘 안 오면 듣고, 속상한 일이 있는데 뭔가를 하기엔 다음날이 걱정될 때 듣고, 주말의 무료한 오후를 아깝게 보내고 싶지 않을 때 듣고, 새로 출간된 책은 뭐가 있나 궁금할 때 듣고, 그냥 설거지할 때 듣고. 그렇게 들었다.


2012년 공개방송을 처음 다녀온 뒤로 막연하게 한 번쯤은 또 공개방송에 가겠거니 생각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바쁜 척하느라 좋아하는 일에 치열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지금도 변변히 아는 것 하나 없지만 베스트셀러 제목조차 낯설어하던 그 시절 빨간 책방의 양분을 무럭무럭 먹고 자랐다. 순 알맹이 없는 내용뿐이지만 그래도 책에 대해 무어라 떠들 수 있게 된 것도 빨간 책방 덕분이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친구랑 팟캐스트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떤 종류의 콘텐츠가 됐건 책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빨간 책방의 영향이었다. 좋은 선생님이고 친구였구나 싶다.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다. 리뷰를 남기면 뭔지 모를 선물들을 준다고 ‘적임자’가 그렇게 열심히 협찬사 이름을 읽어 내려갔는데 나는 리뷰는커녕 별점 한번 남긴 적 없는 무관심 청취자였다.


무한도전 종영 이후로 특정 프로그램의 마지막을 접하며 ‘보내준다’라고 느끼는 건 아마 빨간 책방이 마지막일 테다.


빨간 책방이라는 프로그램이 살아 숨 쉬는 유기체도 아니고 진행자들과 제작자들이 일개 청취자였던 나를 알리도 무방하지만 나는 어째서인가 빨간 책방이 나를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는 한 사람을 감당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고 적었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그 시절 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빨간 책방이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인 것만은 분명하다. 버거웠던 내 한 시절을 감당해주었던 그 모든 수런거림에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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