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nhyuk kim Jun 17. 2019

[인디일기] 위수의 음악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들

‘위’자로 시작하는 따뜻한 단어들 - 위로, 위안, 위수

얼마 전 유튜브로 좋아하는 작가의 토크콘서트를 보다 남몰래 쓴웃음을 지은 적 있다.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이었고 사전에 청중으로부터 받은 질문들이 무대에 세팅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작가가 말문을 열더니 요새 강연을 다니면서 항상 나오는 질문이 뭔지 아냐고 청중을 향해서 되묻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사는 게 너무 힘들 때 작가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또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작가님은 어떻게 해소하시나요’ 이 두 가지라고 답을 알려주었다. 대기 시간의 적막함을 깨기 위해 던진 위트 있는 말이었고 현장에 있던 청중들도 그 얘기를 들으며 박장대소했지만 아마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내가 그 당시의 느꼈던 씁쓸함을 가슴 한편에 담아두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힐링’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트렌드로 떠오른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힐링’은 출판이나 강연, 영화를 소개할 때 여전히 빠지지 않는 단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세상살이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과거에는 ‘힐링’이라는 단어에 반감을 느꼈다. ‘힐링’이라는 단어가 붙은 콘텐츠는 어쩐지 가볍고 얕은 수준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잠깐의 감상으로 지금 당장 기분은 나아지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감정을 해소할 수도, 일을 해결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힘들면 웃고 싶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풀고 싶은 게 사람이니 현재 기분을 타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건 건강한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힐링’은 일종의 자구책인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힐링’이라는 단어보다는 ‘위로’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며 ‘힐링’ 가운데 좀 더 든든하며 단단한 위로를 골라낼 수 있다고 믿는다.      


위수      


위수의 노래를 처음 접한 건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 덕분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위수의 <내일도 또 내일도>와 <예쁘다>를 발견했고 이내 두 곡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표현하는 이 곡들은 드라마틱한 멜로디 없이도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주말 오후 조용한 카페에서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한 설렘을 주는 곡들이었다. 그리고 민트페이퍼 프로젝트 앨범 bright #6에 수록된 <누군가의 빛나던>를 시작으로 나는 위수의 발매된 모든 곡들을 찾아서 들었고 또 들었다. 

민트페이퍼의 컴필레이션 앨범 'bright# 6'


위수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지만 특히 직장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정신없이 업무를 진행하며 몸과 마음이 지친 날에는 위수의 노래가 간절히 생각나는 것이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한쪽 귀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위수의 노래를 한참 동안이나 듣곤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게 겸연쩍지만 위수의 노래를 들으면 자존감이 높아지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봤다. 위수의 음악이 주는, 이 위로라고 할만한 이 효과는 어디서 오는 걸까 하고 말이다. 더 나아가 위수가 주는 '위로'는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힐링' 음악들과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말이다. 


위로     


내가 생각하기에 위로라는 건 양날의 검이다.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는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과 일정 수준 이상의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슬픔이나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의 말 한 두 마디씩 건네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말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거나 오히려 더 상처가 되었던 경험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로는 굉장히 까다롭고 섬세한 기술인 셈이다.


그래서 ‘위로’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기 쉬운 실수가 확신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을 말하거나 실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말을 무심히 던지는 것이다. 위로가 누군가에겐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가 쓴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이 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런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사려 깊은 책이다. 저자들은 비관에 빠져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이 문장을 꼭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하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도 입증할 수 없는 말은 상대에게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자기 자신도 보증할 수 없는 허언에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때문에 위로라는 건 자기가 담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는 것, 느낀 것, 겪은 것 내에서 말이다. 정리하자면 위로라는 건 진솔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위수의 음악을 듣다 보면 위수의 음악이 꼭 다른 쪽 밧줄을 놓지 않는 말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


위수 정규 1집 [Cobalt Blue]


누군가의 빛나던     


누군가의 고민에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내밀한 고민을 조금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로를 듣는 입장에서 삐뚤어진 심산으로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어떻게 알아”라고 되물을 때 위수가 들려주는 말은 “응, 알아”가 아니라 “맞아, 사실 나도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이다.    


힘들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뭐하고 있는지도

잘모르겠어


이 곡의 첫 구절을 들으면서 도리어 내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던 적이 있다. 꼭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다.


이런 가사들은 또 어떤지.


나도 누군가에게 빛나는 사람이고 또 그렇다고 믿었죠


불 꺼진 도로에 찬 바람 같은 걸까

아 아 난 뭐였을까


누구나 자신을 우주의 먼지 같다고 비하하고 싶은 날이 있기 마련이다.


햇빛처럼 빼어난


그런 점에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햇빛처럼 빼어난>이라는 곡도 듣는 이에게 이해받는 느낌을 듬뿍 담아주곤 하는데 이 곡은 앞서 말한 곡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곡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노랫말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줘’는 노래를 부르는 입장에서는 독백 또는 자문이지만 신기하게도 듣는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촌스러운 사람


<촌스러운 사람>은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노래한다. 유행이나 트렌드가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 때 한 번쯤 ‘내가 너무 뒤처진 사람인가’ 하고 되뇌는 때가 있다. 이 곡은 그런 감상을 잘 표현한 노래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위수는 조금 더 단단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뭇 여유롭기까지 하다. 노랫말에서 모두가 공감할 만한 걱정거리를 얘기하지만 광풍 위에 올라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곡의 중반부로 넘어갈수록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씩 나열하는 데 엉뚱하다면 엉뚱하지만 남들은 포착하지 못하는 작지만 소중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풀밭에 벌레들과

하늘 위 떠 있는 희미한 별들

강물에 반짝이는 잔물결


같은 것들 말이다. 남들과 비교하면 세련되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염려하지만 자신을 부정하거나 자책하지 않는 단단함마저 느껴진다. 노래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일련의 ‘그게 뭐 어때서’를 듣고 나면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나’는 ‘촌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남과 다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빛나


너는 나의 모든 말들을

사려 깊게 귀담아주네


‘빛나’는 나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곡이다. ‘너’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직이 설명하는 이 곡을 들으며 울컥하는 감정에 북받친 적이 있는데 그때서야 나는 내가 하루 동안 누군가로부터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어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넌 어두운 곳에 나있는 창처럼 내게 빛을 줘


나는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동안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란 인간일까’를 곱씹으면서 지낼 만큼 자책을 많이 하는 인간인데 신기하게도 위수의 노래를 듣는 순간만은 그런 자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더 나가면 위수의 노래는 듣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당신이 하는 일이 어설프고 요령 없고 미숙하고 노련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반짝반짝 빛나거나 완벽하거나 멋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구나 자신의 그런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때가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위수의 음악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진솔함이 담겨있다. 진솔함과 공감이 담긴 음악. 앞서 위로는 어렵고 까다롭고 자칫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로해주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 그 이유는 위로의 훌륭한 점 중 하나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위수의 음악을 계속해서 듣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위수의 노랫말에 따르면 ‘보랏빛의 새벽에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같은 사람이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일지는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겠지만 적어도 나는 한동안 이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은 찾지 못할 거 같다.      

작가의 이전글 그 모든 수런거림에 고마움을 담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